‘에디톨로지’ 펴낸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정원식 기자

“이 시대의 창조는 정보 편집… 지식 수평적으로 연결돼 대학 역할 크게 축소될 것”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나 탐내는 재능이다. 기술적 숙련보다 창의적 아이디어의 중요성이 끊임없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창조적 재능은 생존의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문제는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느냐다.

방송에서 보여준 재치 있는 입담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씨(52)는 거침없이 말한다. “창조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편집이다.” 최근 그가 펴낸 <에디톨로지>(21세기북스)는 ‘창조는 편집’이라는 사실을 학술·산업·예술 등 여러 영역을 두루 살피면서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까지는 선택과 집중의 시대였죠. 하나만 열심히 파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예요. 21세기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예요. 정보는 누구나 얻을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편집하느냐입니다.”

사진 21세기북스 제공

사진 21세기북스 제공

그가 ‘창조는 편집’이라는 아이디어를 다듬기 시작한 것은 2006년 객원 연구원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에 있을 때부터다. 일본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과 일본 최고의 다독가 마쓰오카 세이고의 영향을 받았다.

“창조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글을 읽고 ‘편집’이란 말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세이고가 말하는 ‘편집공학’은 너무 사변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름의 창조 방법론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에디톨로지’라는 용어를 고안했습니다.”

책에서 그는 에디톨로지를 ‘노트와 카드의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독일 유학 시절 그는 도서관에서 독일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대부분 작은 카드에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카드 맨 위에는 키워드를 적고 그 아래에는 연관된 개념을, 그리고 카드 앞 뒷장에는 관련 내용을 요약한다.

“독일 학생들은 모은 카드를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시 편집한다.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카드를 쓰는 것이다. (…) 이때 정리는 그저 알파벳순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설정한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카드를 편집하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된 카드가 바로 자신의 이론이 된다.”

자기 기준에 따라 재구성할 수 있는 카드를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면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독일 학생들이 데이터베이스를 편집하며 자기 이론을 만들 때 한국 학생들은 노트를 통째로 암기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성과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김씨는 이처럼 지식의 주체적 편집이 창조의 동력이라고 본다.

오늘날 지식은 더 이상 계층적으로 분류돼 있지 않고, 네트워크를 통해 수평적으로 연결돼 있다. 지식을 만들어내는 주체들의 자리도 과거의 위계적 구성과는 달라졌다. 김씨는 이 때문에 대학의 역할이 크게 축소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과 미네르바 사건은 지식 권력이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본다.

‘서울대 교수’ 황우석의 논문 조작 혐의를 포착한 것은 네티즌들이었고, 박사급 연구자라고 생각했던 미네르바는 인터넷의 잡다한 지식을 편집한 전문대 출신 무직자였다는 것이다. “대학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고 있어요. 검색만 하면 중요한 자료를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대학이 지식권력의 핵심이던 시절은 해체되고 있어요.”

예술적 ‘천재’가 뛰어난 예술 창작의 필수 요소로 간주된 예술 영역에서도 ‘창조는 편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천재란 개념 자체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편집된 것이라고 말했다. “천재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서 나와요. 피카소는 ‘표상’으로서의 미술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수단에 의해 위협받던 시절의 산물이죠. 스티브 잡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가 우연히 한 개인에게 모인 결과입니다. 창조 과정을 신비화시키면 안돼요. 하이퍼텍스트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과거의 천재들처럼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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