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물처럼 하나씩 꺼내 보이듯 교정을 둘러싼 산들은 하얀 레이스 같은 눈을 켜켜이 품고 있다.
점심 급식을 받고 우리 반 스물여섯 아이들과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오늘은 상혁이와 점심시간 데이트를 하는 날이다. 내 옆에 앉은 상혁이에게 나는 “상혁아! 3학년이 끝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뭐야?” 하고 물었다.
아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준하가 더 용기를 내게 하는 거요”라며 숟가락에 밥을 한 가득 퍼올리며 대답한다. 무슨 특별한 행사 같은 것을 생각했던 나는 순간 감동하며 아이 눈을 다시금 바라본다. 내 마음에도 하얀 눈이 내려앉는다. “상혁이 같은 친구를 둔 준하는 참 행복하겠다.” 내 말이 내리는 곳에 꽃같이, 선물과 같이….
![[교단에서]새해에 가장 하고 싶은 것](https://img.khan.co.kr/news/2013/01/07/l_2013010801000669900062041.jpg)
오후에는 리코더 연주 시험을 보았다. ‘옥수수 하모니카’를 선곡한 효민이는 음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지 못하고 한 소절 한 소절을 힘겹게 넘어갔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모두들 긴장하고 있던 아이들은 자기 일인 양 친구를 집중해서 바라본다. 효민이가 악보의 셋째 단을 따라 느리게 리코더로 연주하다 돌연 멈춘다. 고개를 떨군 채 상기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는 효민이를 바라보며 아이들은 “우나 봐요” 하며 같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괜찮다고, 이어 계속 하라고 내가 말해 주려는 찰나, 효민이의 짝 진호가 나 대신 “괜찮아. 틀려도 돼. 어차피 나도 틀릴 거니까” 하며 효민이를 향해 해맑게 웃어준다. 그러자 아이들도 긴장을 풀고 덩달아 웃음을 터뜨린다.
1학기 때부터 리코더 연주를 배워왔지만 건우는 아직도 모든 음이 삑삑 소리만 난다. 현빈이와 준하, 혜원이와 하연이는 도레미파솔라시도 기본음 운지도 서투르다. “괜찮아, 처음에는 누구나 어려워.” 어려워하는 아이들 곁에 다가가 리코더 위에 올려진 그네들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주었다.
혜원이는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지만 리코더 구멍이 채 닫혀지지 않아 손가락 힘을 풀고 부드럽게 리코더를 잡도록 해 주었다. 자기를 놀리지는 않을까 큰 눈으로 친구들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준하에게는 혹시나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선생님도 어릴 때 처음에는 그랬어. 계속 연습하다보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 어릴 적 선생님도 그러하셨지. 그날 나는 리코더 실기시험을 보고 집에 갔다가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선생님, 죄송한데요. 시험 다시 한번만 보게 해 주시면 안될까요?” 내성적이었던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선생님 혼자 계신 교실에서, 선생님 책상 바로 앞에서 재시험을 보았다.
더 잘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쿵쾅쿵쾅거려 중간 중간 음까지 떨려 안타깝기만 하였는데 그때 선생님께서는 리코더를 연주하는 내 손가락이나 음의 부드러움을 보고 계신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잔뜩 숙여 리코더를 연주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선생님의 눈길을 열한 살 나도 느낄 수가 있었다.
작은 것 하나도 최선을 다해 보려는 어린 제자를 우리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가을 들판처럼 넉넉하게 품어주셨다.
원하기만 하면 다시 연습하여 언제든지 재시험을 볼 수 있게 하자고 아이들과 약속하였다. 그리고 어려워하는 친구에게 도우미가 되어 리코더 연주법을 잘 알려주는 친구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로 하였다.
이후로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아침 자습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 ‘옥수수 하모니카’ ‘가을바람’ ‘잠자리’ 등의 노래를 리코더로 연습하였다. 형균이는 일기장에 “나는 리코더로 ‘누구를 닮을까’를 연주하였다. 그때 상혁이가 웃음을 지었다. 내 리코더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은 힘찬 박수를 나에게 보내 주었다. 더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좋겠다. 다음주에 재시험을 보고, 또 노력이 필요한 친구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사랑스러운 다짐을 담아놓았다. 그리고 나는 ‘아름다운 리코더 연주처럼 우리 형균이의 삶도 늘 맑고 밝고 감동적인 삶이 되길 바란다’는 답글을 적어 주었다.
재시험을 보는 날 혜원이는 이제 리코더에 올려놓은 손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혜원아! 친구에게 다가가는 것도 바로 그렇게 하는 거란다. 내 고집대로 움켜잡는 것보다 친구와 나 사이에 잔잔한 봄바람이 불어 잇게 하는 것.’ 전보다 맑게 리코더를 연주하는 아이의 예쁜 속눈썹을 바라보며, 아이가 지난 한 해의 고민을 딛고 앞으로 더 좋은 친구 관계를 맺어가기를 기도하였다.
새해, 선생님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바로 그거란다. 너희들에게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용기를 심어주는 것, 그리고 너희들 역시 너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 가슴에 너희들이 바라보기만 해도 환호하는 겨울철 하얀 눈송이 같은 용기를 선물로 안겨주며 살게 하는 것…. 오늘도 창문 밖에 산들은 흰 눈을 품고 따뜻하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