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경찰청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하던 일선 수사팀에 핵심 수사자료를 넘겨주지 않으려 하고, 주요 증거물을 피의자에게 돌려주려 하는 등 지속적으로 수사를 방해했다고 당시 수사 책임자가 폭로했다. 지난해 대선을 사흘 앞둔 12월16일 밤 갑자기 면죄부성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도록 지시해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발당한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 등 지휘부가 사건 수사에까지 부당하게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어서 검찰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관련기사 5면
이 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권은희 전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은 19일 <한겨레>와 만나 “(지난해 12월16일) 서울경찰청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 뒤 아예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최종 분석자료를 우리에게 안 주려고 했다. 우리(수서경찰서 수사팀)가 ‘당신들 법 위반이다’라는 말까지 하며 격렬히 항의했다”고 말했다.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직무 수행을 거부하면 직무유기죄에 해당한다. 서울경찰청은 16일 밤 분석을 끝낸 자료를 중간 수사 결과 발표에만 이용한 뒤 이틀이 지난 18일 밤에야 수서경찰서에 건네줬다.
또 서울경찰청은 국정원 직원 김씨가 제출한 하드디스크 등을 김씨에게 돌려주려다가 수서경찰서 수사팀의 강한 항의를 받고 계획을 철회한 것으로 확인됐다. 권 과장은 “제출된 컴퓨터 등은 사실상 압수상태인 증거물이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상) 증거물 관리에 대한 판단은 수서경찰서가 해야 한다고 서울경찰청에 주장했다”고 밝혔다.
앞서 서울경찰청은 하드디스크 분석 과정에서도 사건 축소·은폐를 시도했다. 수서경찰서 수사팀은 애초 서울경찰청에 국정원 직원 김씨의 하드디스크 분석을 의뢰하면서 총 78개의 키워드로 국내정치 관련 게시글·댓글 등을 찾아내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서울경찰청이 ‘수사의 신속성’을 이유로 키워드 숫자를 줄이도록 지시했다. 권 과장은 “처음에 우리는 항의하고 반대했다. 결국 반나절 회의한 끝에 키워드를 4개(박근혜, 새누리당, 문재인, 민주통합당)로 줄였다”고 말했다.
더욱이 서울경찰청은 하드디스크 분석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 김씨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고 파일을 살펴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권 과장은 “김씨는 당시 피의자 신분이라 컴퓨터를 사실상 압수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조사 방식에) 이견이 있었다”고 밝혔다.
결국, 경찰은 이처럼 부실한 분석 작업을 거쳐 그 결과만 가지고 “김씨가 댓글을 게재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권 과장은 “(중간 수사 결과 발표가)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장을 통해 반대한다는 의사를 (상부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경찰 수뇌부는 새누리당 쪽에 불리한 수사 내용을 언론에 알리지 말도록 수사팀에 지시하기도 했다. 권 과장은 “(국정원 직원 글에서) 특정 정당과 관련한 어떤 패턴이나 경향이 보인다는 분위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서장을 경유해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서울경찰청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어 “김씨는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글에 대해서만 확인한다’는 조건을 달아 컴퓨터를 임의제출했기 때문에 분석 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수사팀이 의뢰한 키워드 중엔 대선과 관련성이 없는 단어가 대다수였다”고 해명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분석자료를 넘겨주기 위해 문서파일로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허재현 박현철 기자 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