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공주의 통치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셰익스피어는 말없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명한 정의를 내렸는데, 왠지 환상을 깨는 경고처럼 들린다. “그들은 무식하거나 화젯거리가 없어서 단지 ‘할 말’이 없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유로 말이 없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없는 남성은 과묵함으로, 말없는 여성은 조신함과 교양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우리 문화에서는 말을 잘한다 해도 과묵보다는 호감이 덜한 편이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잠자는 공주의 통치

바람직한 문화가 아니다. 토론도 못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양산할 소지가 크다. 특히, 정치인이 말이 없다? 이건 매우 곤란하다. 자질과 관련된 문제다. 정치인은 수시로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등장 초기부터 안철수 의원에게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과묵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 표명이 드물다보니 정체가 뭐냐는 얘기부터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늘 따라다녔다. 정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공유하는 일이다. 소신과 정의감을 담은 발언, 정치인의 존재 이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인격과 지성이 넘치는 민족의 지도자’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여성운동의 지도자’여서 당선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여당에 대한 지지와 무관했다. 나는 후보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매력과 경쟁력을 갖춘 경우였다. 이 전 대통령은 부자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의 씩씩한(‘뻔뻔한’) 캐릭터에 대한 선망, 현직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성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아버지의 딸’이었기 때문에 당선되었다.

개인으로서 여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딸’로서 부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녀의 통치 전략은 철저히 여성스러움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성별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능력이든 잘못이든 본인 탓만은 아니다. 나는 그녀가 세상물정을 잘 아는 영리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다만, 국민과 공동체를 위한 자질이 아니라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위한 것이어서, 현재도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핵심은 말에 있다. 전직 대통령은 ‘딴소리’로, 현직 대통령은 ‘침묵으로’ 국가 최고위직을 수행하는 듯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매우 효과적이다. 여성(대통령)이 많이 없으니 ‘우아함’이 배가된다. 대통령은 외모, 패션, 외국어 연설 등 중상층 여성의 지체 높은 이미지로 존재하고, ‘더러운 노동’은 70대 중반(연령 관련 비하 의도는 없다)의 노회한 참모와 국정원이 하고 있다. 새누리당도 비판하는 바다.

내 관심사는 여성과 말의 관계다. 수천년 동안 가부장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은 인간 행동에 대한 차별적 평가에 있다. 폭력, 언어, 성(性)에서 두드러진다. 흔히 이중잣대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이 세 가지는 남성에겐 지나치게 관대해 거의 무한대로 허용된 반면 여성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가정폭력 상담을 하다보면 남성은 열 대를 때려야 폭력 남편으로 인식되는데, 여성의 정당방위는 단 한 대도 폭력으로 간주된다. 성의 이중 윤리는 말할 것도 없다. 남성 지식인과 정치인의 다변은 지성 혹은 자연스러운 권력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말 많은 여성은 직업을 불문하고 비호감이다.

원래 동화는 순수와 거리가 먼 잔혹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많다. 최근 동화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화의 역할은 어린이에게 사회의 지배 규범을 전수하는 데 있다. 대부분의 동화에서 여성(공주)은 말이 없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중에 나를 옥죄는 이야기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고 다른 하나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전자는 피부가 좋아지려고 그랬는지 내내 잠만 자던 공주가 왕자가 키스하자 깨어난다(사람이 된다). 다른 이야기는 어떤 공주가 말만 하면 입에서 오물 덩어리, 징그러운 벌레, 뱀 등이 튀어나와 여성의 말에 대한 혐오를 가르친다.

내 말과 글이 ‘고상’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 이야기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나는 지금도 언어에 대한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의 언어와 지식을 통제한 성공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여성의 박식함, 풍부한 언어는 아직까지도 ‘현숙한 여성’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욕설은 성차가 심하다. 남성의 욕설은 ‘자연스럽다’ 못해, 통쾌한 경우마저 있다. 여성이 욕을 하면 민망하다. 정치는 말의 잔치이고, ‘현실 정치’는 거친 말의 경연장이다. 성별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여성은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세습’은 북한과 달리 엄청난 (선거)비용이 들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잠자는 공주를 뽑은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키스해줄 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말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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