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력·체력 키우기 명분 여학생들까지 군대 체험
이벤트성 캠프로 내몰아… “새로운 경쟁이 추가된 셈”
“진짜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더니 우리들을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바닷속으로 밀어넣었어요. 조교가 노로 보트로 올라오는 아이들을 다시 물에 빠뜨리곤 했는데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캠프’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요.”
지난해 충남 서해안 지역에서 열린 여름철 해병대 캠프에 다녀온 고교생 ㄱ군(17·대전 서구)은 22일 “캠프 프로그램이 너무 위험하다고 학교 선생님과 부모님들께 말했지만 어른들은 캠프는 원래 위험한 것이고, 남자라면 그 정도의 위험은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야외레저 활동과 군대 열풍 속에 군사문화의 잔재로 민주화 이후 사라졌던 ‘극기훈련’ 문화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슬픔 22일 충남 공주사대부고 대강당에 마련된 사설 해병대 캠프 희생학생 합동분향소에서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이 서로 끌어안고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기업체와 공공기관들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을 강한 인재로 키워야 한다며 앞다투어 극기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해병대 캠프다. ‘입시나 취업에 도움이 된다’며 학생층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국토대장정’ 역시 인내력과 극기를 강조하고 있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들도 극기훈련에 참가해 정신력과 체력을 키운다는 소식이 수시로 전해졌다.
몇 년 전 배우 현빈이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일기 시작한 군대 열풍은 최근 MBC의 인기 병영체험 프로그램 <진짜사나이>로 이어지며 여자 중·고교생은 물론 여대생들까지 군대를 체험할 수 있는 캠프로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극기문화’가 한국형 심신수양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일본인 등 외국인들까지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사례도 있다.
극기훈련 열풍은 초·중·고교와 대학 등 일선 학교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증후군처럼 퍼져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자기 계발의 패러다임이나 또 다른 치유(힐링)의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상업적으로 포장됐다는 것이다. TV 등 대중매체는 참가자들이 힘든 과업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고 극기 프로그램을 포장하기에 바쁘다.
전문가들은 공교육 체계 안에 제대로 된 청소년 정신·문화교육 프로그램이 없는 것을 청소년 극기훈련 열풍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이정우 한국청소년교육연구소장(29)은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의 생활교육이 무너진 만큼 대신 손쉽게 이벤트성으로 극기 캠프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범이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회장(49)은 “해병대 캠프의 인기는 입시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가 경쟁이고, 극한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한다는 풍조와 연관된다”고 했다.
박성옥 대전대 아동교육상담학과 교수는 “시대와 세대가 모두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체력과 참을성·대담성 등만을 획일적으로 강조하는 극기캠프는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사회 많이 본 기사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경쟁의 과열을 이유로 꼽았다.
김 교수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전에 평가하지 않았던 인내심, 신체적 지구력 같은 부분까지 사회적 평가의 대상으로 확장된 것”이라며 “그래서 극기훈련에 참가하게 되고, 그 안에서 다시 극기의 정도를 평가받는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점수 계량 같은 평가 방식은 모두가 익숙하고 어느 정도 잘하니까 새로운 경쟁 부문이 또 더해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