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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항쟁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이 "당시 무고한 민간인을 사살했다"며 21년만에 양심고백을 했다.

특히 10여명의 공수부대원이 정지명령에 손을 들고 돌아선 민간인 한 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져 당시 발포명령에 대한 책임소재에 따른 파문이 예상된다. 또 지난 5공 청문회 당시 "공수부대의 민간인 사살은 없었다"는 증언에 대해 '거짓증언'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규명위) 특별조사과 김학철 과장은 18일 오후 1시 종로경찰서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갖고 "5·18 때 군인이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제보를 받고 기초조사를 벌여 지난 4월 26일 당시 공수부대원으로부터 민간인 사살에 대한 양심선언을 얻어냈다"며 "아직 직권조사를 벌이지 않아 정확한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5·18 21주년을 맞아 발표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과장은 "이 양심선언자가 당시 민족에게 대단히 안타까운 시기로 자기도 군인의 한 사람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한 것인데 중대장 명령에 의해 발포하고 나니 비무장 시민이었다고 말한 뒤 차라리 총을 든 사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무고한 양민을 사살하고 암매장한 것 때문에 그 동안 죽은 사람과 유가족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의문사규명위 특별조사과 김학철 과장은 "사망자의 유가족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며 "더 많은 양심선언자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 최경준
이 양심선언자는 당시 7공수특전단 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소속으로 광주민주화항쟁 진압을 위해 광주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 부대 지휘관인 권승만 중령(당시)은 지난 88년 5공 특위 때 청문회에 나와 "5·18 당시 7공수에서 양민을 사살하거나 암매장한 적이 없다"고 말해 '거짓증언'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이 양심선언자는 "통신으로 사살 지점 좌표, 사살자 주민등록번호 등을 부대에 불러줬고, 사살자의 소지품까지 챙겨서 부대에 가지고 갔다"며 "부대에서 작성하는 작전일지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의문사규명위 특별조사과 이전행 조사관은 "그 작전일지가 있으면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도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조사해본 결과 현재까지 그 사건에 대한 작전일지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모내기하러 가던 양민, 10여명의 공수부대원에게 무참히 학살

이 양심선언자에 의하면 80년 5월 21∼22일경 33대대는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에서 철수해 광주시 남구 노대동 노대 남 저수지 부근에 매복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22∼23일 오후 2시경. 주변을 지나가던 민간인 4명(두 명은 노부부, 두 명은 20대 남자일행)을 발견한 부대원은 이들을 '폭도'로 오인하여 산 위에 있던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의문사규명위가 기초조사에서 만난 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부대원 11명은 5∼6명씩 두 팀으로 나뉘어져 이들 민간인을 막아선 후 "정지! 정지!"라고 외쳤고, 총을 든 군인을 보고 놀란 이들 중 두 명의 젊은 남자는 산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중대장으로부터 발포명령을 받은 부대원은 공중으로 한발, 바닥으로 한발의 공포탄을 쏜 후 이어 이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두 명의 남자중 한 명은 이를 피해 도망갔으나 한 명은 부대원의 정지명령에 제자리에 선 채 손을 들고 돌아섰지만 부대원의 집중 사격에 머리를 관통 당한 채 사살됐다. 부대원은 사망자의 시신을 현장에 매장했다.

사건이 발생한 광주 남구 노대동 지역의 지도. 빨간색 동그라미 부분이 사건지점.ⓒ 최경준


의문사규명위 최학철 과장은 "이러한 사실을 양심선언자와 당시 그의 동료였던 공수부대원 4명, 노대동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최 과장은 또 "현장에서 발포명령은 중대장이 내렸지만 그 윗선에서 내렸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전행 조사관은 "여러 명이 한 탄창을 거의 다 쏜 것으로 보인다"며 "양심선언자 자신도 쐈지만 누구 총에 맞아 사살된 것인지는 밝히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편,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한 한 아주머니는 "군인들이 시신 매장을 위해 마을 주민에게서 삽을 빌렸다"며 "시신을 매장한 곳은 우리 시부모 묘소 앞이었다"고 증언했다고 의문사규명위는 전했다. 목격자 아주머니는 다음날 매장한 시체를 파서 인근에 가매장 해주었다.

또한 사건발생 4일 후 사망자와 동행했던 사람과 사망자의 아버지, 소아마비 환자인 사망자의 형, 사망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시신을 옮겨갔다.

노대동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와 동행했던 사람이 군인을 피해 이 마을에 숨어들어 하룻밤을 지내고 갔으며 그는 고향인 전남 고흥으로 모내기를 하러 가던 중이었다고 전했다. 또한 양심선언자는 "당시 사망자의 주민등록번호가 자신보다 두 살 많은 55년생이었고 주소가 전남 광주 아래쪽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말했다.

이에 따라 의문사규명위원회는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한편, 유가족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한 당시 대대장 등이 지난 5공 특위에서 했던 증언들도 조사해 발포명령자를 찾아낼 예정이다.

의문사규명위원회는 또 "현재까지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망자 중 55년생 정도의 남자로 고흥이 고향인 사람은 없었다"며 "노대동 저수지 부근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도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 여부는 5월 26일 결정될 예정이다. 직권조사가 이루어지면 의문사차원에서 진상조사를 할 수 있게 되고, 사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사망자 시신 5·18묘역 안치 절차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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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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