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그때 그 늬우스] 당시(當時)의 박경비주임(朴警備主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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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을 발사하여 김주열(金周烈)군을 즉사케 한 경찰관은 누구였을까? 검찰에서 방금 이에 대한 수사를 전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 三·一五때 발포한 경관 중 최루탄을 발사한 경관은 시청앞 사태를 지휘하고 있었던 경비주임 박종표(朴鐘杓)(三九) 경위였음이 밝혀졌다. ··· 이날 하오 七시二十분경 무학국민학교 앞에서 약 三千명의 학생, 일반시민이 데모를 하고 투석을 하는 까닭에 서인조(徐仁祚) 순경 외 十명의 경관을 지휘, 공포 발사를 명했고 자기 자신은 최루탄 三발을 발사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 1960년 4월 14일>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사체가 떠올랐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다시 일어섰고, 3·15의거에 이은 2차 시위가 벌어졌다. 4월 12일부터 신문 지면은 마산의거에 대한 보도로 채워졌다. 그런 가운데 김주열 열사를 살해한 주범의 윤곽이 14일자 지면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던 박종표 경위. 이 자의 내력을 조사해보니 미완의 과거 청산이 남긴 폐악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박종표는 일제강점기 아라이라는 일본명을 쓴 친일 헌병이었다. 부산헌병대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를 체포, 구금하고 고문한 악질 앞잡이였다. '반민특위 재판기록'에 따르면 곤봉, 죽도 등으로 구타한 것은 예사고 2~3일간 굶기거나 잠을 재우지도 않았으며 뜨거운 화로를 머리 위에 들고 있게 하는 등 악랄한 고문 방법을 썼던 것으로 나온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 여파로 무죄 선고를 받아 다시 경찰관으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3·15의거 때 김주열 열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4·19혁명 재판에서 박종표는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나중에 풀려났다고 한다. 고은 시인의 연작시집인 '만인보'에는 김주열 열사 등 3·15마산의거 희생자들과 함께 박종표에 대한 시도 포함돼 있다. 김주열 열사와 더불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박종표다.

정광용 기자 ky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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