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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의 훈계보다 더 와 닿는 1번의 ‘교육연극’

어느 고등학교 교실의 쉬는 시간. 이른바 ‘일진’인 남학생이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고 자리에 앉아있는 같은 반 친구에게 다가간다.“여어~, 북쪽 얼굴(노스페이스)! 그거 입으면 따뜻하지? 나도 추운데 좀 빌려 입자.”

점퍼를 입고 있는 학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안돼”라고 말했지만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다. 그러다 이내 일진에게 점퍼를 빼앗기고 만다.

점퍼를 빼앗긴 뒤 셔츠 바람으로 집에 돌아온 아들을 본 엄마는 “점퍼 어쨌어”라며 아이를 다그친다.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학교에 두고 왔어요”라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엄마는 아이의 방 문에 대고 “그게 얼마짜린데 말이 되니, 공부나 하라고 사줬더니…당장 학교에 가서 찾아와!”

지난 2월 서울시교육청에서 공연된 <양들의 침묵>이란 제목의 연극 속 한 장면이다. 연극의 각 장이 끝나면 연극을 관람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토론을 벌인다.

교육연극 전문극단 ‘마실’ 단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성북예술창작센터 연습실에서 학교폭력을 주제로 다음달 무대에 올릴 예정인 연극의 일부를 선보이고 있다. 이날 리허설에는 패트리스 볼드윈 세계교육연극협회장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참석했다. | 서울시교육청 제공

교육연극 전문극단 ‘마실’ 단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성북예술창작센터 연습실에서 학교폭력을 주제로 다음달 무대에 올릴 예정인 연극의 일부를 선보이고 있다. 이날 리허설에는 패트리스 볼드윈 세계교육연극협회장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참석했다. | 서울시교육청 제공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나’란 주제에선 점퍼를 빼앗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까지 서서 그들의 속마음이 어떤지를 이야기했다. ‘피해학생은 좀 더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하고 가해학생은 동급생 친구를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다소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하긴 했지만, 학생들은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주인공들의 감정에 몰입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엄마’였다. 일상생활에서 접했다면 “엄마의 대응이 뭐가 잘못됐냐”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터이지만 연극을 관람한 학생들은 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엄마가 아이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아이의 성적과 돈밖에 모르는 것 같다” 등 학생들은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기회도 가졌다.

교과 수업에도 연극이 활용된다. 서울 신반포중학교에서는 지난해 10월 도덕 수업시간에 연극을 도입했다. 연극을 통해 상황을 설정하고 주인공들의 생각이 어떤지 지켜본 학생들 각자가 해석한다. 연극 중간중간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질문과 대답이 무수히 오고 간다.

“어떤 녀석들이 담배를 피워! 너희들 안에서 뭐했어? 담배가 얼마나 건강에 나쁜지 몰라?”

한 아이가 목소리를 높이자 교실은 일제히 웃음바다가 된다. 교사가 갑자기 끼어들어 질문을 던진다. “방금 여러분들은 왜 웃었죠?”

아이들은 “건강에 나쁘다는 걸 몰라서 담배를 피우는 애들은 없어요” “선생님보다 같이 피우자고 하는 선배들이 더 무섭죠”라고 답한다.

교사가 또 묻는다. “담배를 이렇게 피우는 걸 보면 담배 구입이 어렵지 않은가 본데, 여러분이 담배가게 주인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청소년에겐 절대 팔지 않겠다는 사람, 손 들어봐요.”

10여명의 학생이 손을 든다. 나머지 30여명에게선 청소년에게 담배를 파는 것에 그다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읽힌다. 교사 입장에서도 잘 몰랐던 것을 연극과 토론을 통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난생처음 수업시간에 교육연극을 접한 학생들은 초기에는 어색해했다. 그러나 모둠별로 학생들이 직접 각본·연출·연기까지 맡아 극을 꾸리면서 집중도는 차츰 높아져갔다. 학생과 교사 사이의 쌍방향 수업은 횟수가 늘어날수록 진화했다.

교육연극의 효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에 있다. 학생이 연극을 통해 상황을 간접 체험함으로써 수동적인 학습에서 벗어나 공부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효과도 있다.

교육연극은 예술·감성 영역뿐만 아니라 일반 교과에도 접목이 가능하다.

도덕 교과라면 학생들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기해 볼 수 있고, 사회 과목이라면 총선·대선 등 선거를 주제로 극을 올릴 수 있다. 가정 과목은 학교 급식을 주제로 할 수도 있다. 영어로만 대사를 하는 영어연극도 대사를 외우는 과정에서 영작문이나 회화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아이들은 스스로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찾고, 자신의 역할을 정하고, 연극 대본을 함께 쓴다. 필요한 소품도 친구와 함께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학교 성적으로만 분류돼 왔던 아이들 각자의 숨겨진 재능도 발견할 수 있다. 연극 준비 과정에서 아이들은 굳이 암기하려 하지 않아도 내용을 파악하게 되고 사안을 판단하는 논리적 사고력을 키우게 된다. 교사는 모든 아이들이 소외되지 않고 연극에 참여하도록 하는 조정자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구민정 서울시교육청 문예체 태스크포스팀 파견교사는 “선생님들은 교과과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한 학교에서 같은 교과목 교사들의 동의만 있다면 연극수업을 정규 교과 시간에 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친구들과 함께 준비하면서 공부한 연극 수업 주제는 굳이 외우지 않아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교육연극이 재미도 있고 인성교육에도 효과가 있다’는 얘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학부모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주5일 수업제 전면 실시로 학교 밖 교육프로그램 수요가 높아지면서 공공기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 마련하는 초·중등 학생을 위한 교육연극도 늘고 있는 추세다.

이 같은 국내의 열기에 힘입어 세계교육연극협회장이 최근 한국을 찾기도 했다. 한국교육연극학회 초청으로 방한한 패트리스 볼드윈 세계교육연극협회장(59)은 지난 12일 서울 성북예술창작센터를 방문했다.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교육연극을 연습 중인 단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과의 대담도 있었다. 볼드윈 회장은 이날 현직교사 80명을 대상으로 ‘아이들에게 연극이 필요하다’는 주제의 강연을 한 것에 이어 14일 현직교사와의 워크숍, 교육연극 학술대회에도 참석했다.

연극의 교육적 효과 확산을 위해 서울시교육청도 나섰다. 교육연극을 위한 학교 지원과는 별도로 조만간 11개 지역교육지원청의 총 44곳의 장소에서 각각 교사와 학생, 지역인사 등 2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교육연극 포럼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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