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적이 아니라 배움이다

송현숙 기자

교육은 상품성을 키우는 게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 ‘어떤 사람으로’가 아닌 ‘얼마짜리로 키우는가’를 교육으로 오해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ㄱ씨(45·의사)는 지난해 큰아이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서울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왕복 30분 이내였던 출퇴근 시간은 3~4시간으로 늘어났고, 40평대 아파트는 20평대 낡은 아파트로 줄었다. 10년 이상 정들었던 이웃, 친구들과도 이별했다. 오로지 아이들이 명문대 진학에 한층 가까워질 것이라는 기대 하나로 이를 감수하고 있다. 서울 목동에 사는 대기업 부장 ㄴ씨(44)는 현재 중3인 큰딸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 가족여행은커녕 외식 한번 해본 적이 없다. 최소한의 생활비용 외에는 모두 두 딸의 사교육비에 써야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정든 동네를 떠나고 가족이 헤어지고,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엄마가 비정규직으로 일에 나서는 등 사회 전체가 교육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한꺼풀만 들춰보면 대부분의 교육 문제는 대학입시 문제다. 부모들의 관심과 걱정은 오직 아이의 성적뿐이다.

경기도 혁신학교로 지정된 이천시 이천사동중학교 학생들이 16일 국어 수업시간에 학교 홍보물을 만들어 선생님께 제출하고 있다. 혁신학교는 성적 향상보다는 배움과 돌봄의 공동체,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교육을 표방한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경기도 혁신학교로 지정된 이천시 이천사동중학교 학생들이 16일 국어 수업시간에 학교 홍보물을 만들어 선생님께 제출하고 있다. 혁신학교는 성적 향상보다는 배움과 돌봄의 공동체,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교육을 표방한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교사와 전문가들은 우리의 교육이 이미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로 자라는가’에 관한 일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아이가 남보다 높은 ‘스펙’을 쌓아 높은 연봉과 지위를 선점하는 ‘상품으로서의 경쟁’을 벌이면서 교육이 고통스러워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상품교육’의 정점에는 대입 문제가 있다.

“두세 살 때 한글을 뗀 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어학연수 등으로 영어의 기본을 다지고, 악기와 운동을 중점적으로 마스터한다. 고학년 때는 예체능은 접고 본격적으로 영어와 수학, 과학, 논술을 준비해야 한다. 중간중간 드럼이나 킥복싱, 영화와 외식 등으로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아이의 명문대 입학을 위한 ‘열성 부모’들의 계획표는 이처럼 빈틈이 없다. 최대의 생산성을 위해 필요한 원자재와 적절한 시간을 투입하는 과정엔 이미 경제이론이 그대로 투영됐다. 극성부모들의 이런 움직임은 다른 부모들에게도 쉽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답게 키운다’는 교육의 본질이 ‘상품교육’으로 치환되면서 많은 부모들은 한편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 ‘게임하지 말라’와 ‘몇 점 맞으면 게임기를 사주겠다’는 당근과 채찍이 공존하며 교육이 거래로 변질된다.

안산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아이들을 성적 중심으로 보게 된다. ‘다른 건 못해도 공부만 잘하면 돼’라면서 성적을 위해 잘못된 것을 다 용인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교육자인가 자괴감이 들 때가 많다”고 했다. ‘상품교육’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변질시킨다. 1년 내내 엄마와 아이가 하는 대화란 고작 “학원 가야지” “힘들지” “우리 딸 힘내” 정도이다.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5) 성적이 아니라 배움이다

교육의 본질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학교는 가장 비교육적인 공간으로 전락했다. 시험만 보면 “몇 개 틀렸어?” “다른 애들은?”이라고 묻는 부모 밑에서 아이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협력보다 경쟁을 내면화한다.

국·영·수를 잘하는 아이들이 대접을 받고 독서실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학교 분위기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약한 아이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표출한다.

연초 어린이 교양잡지 ‘고래가 그랬어’ 100호에는 ‘중학생 되기 겁이 나’라는 아이들의 토론이 실렸다. 학생들은 “학업경쟁이 심화되며 성적을 더 받기 위해 친구관계가 수단화됐다”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며 괴로움을 호소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이거 수행평가에 들어가요?’라고 물어보고 답변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며 “벌써부터 모든 것을 시험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 같아 무섭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들은 대학교에 가서도 경쟁을 멈추지 않는다. 조한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글로벌 초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 대학생의 딜레마와 대학’이라는 글에서 “2000년대 후반 명문대에 입학한 ‘승자’들은 경쟁을 내심 즐기고 있다”며 “더 나아가 그런 경쟁을 지속적으로 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점에 놀랐다”고 밝혔다.

해답은 없을까.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교육연구소’ 대표는 “상품성이 아닌, 인간성을 키우는 교육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의 본질은 건강하고 조화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남과의 비교나 목표달성이 기준이 된다는 건 모든 아이의 성장이 하나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 명의 아이에겐 만 명의 성장방식이 있다는 걸 되새기며, 아이 나름의 성장과정에 박수를 쳐 주는 것이어야 한다. 아이가 첫걸음을 뗐을 때, 처음 말을 했을 때처럼 아이들의 성장 전 과정이 기쁨과 축하의 장이 되어야 한다.

※ ‘나도 약속’ 서명에 참여해 주세요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캠페인에 공감하는 분들은 홈페이지(www.7promise.com)에서 서명을 할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고래가 그랬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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