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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하와이에는 살아 있는 화산들이 여럿 있다. 킬라우에 화산만 해도 이따금 하늘에 대고 불질을 한다. 그럴 때마다 시뻘건 용암이 안전지대까지 흘러 주택을 덮치기도 한다. 

평온한 하와이 동포사회에 화산폭발을 일으킨 건 이승만이었다. 무자비하게 흘러내린 그 용암은 여러 사람들에게 화상을 입혔다. 그 첫 희생자는 당시 국민회 총회장을 맡고 있던 김종학이었다.

붉은 혀를 내밀어 하늘을 핥고 있는 하와이의 살아 있는 화산
 붉은 혀를 내밀어 하늘을 핥고 있는 하와이의 살아 있는 화산
ⓒ 저작권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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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놀룰루의 밀러 스트리트에 국민회 회관이 건축된 건 1914년 12월 19일. 그런데 건축기금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지출이 드러났다. 건축비는 모두 7400 불 정도가 소요됐다. 1915년 1월 15일 대의원회 회계보고에서 모금위원 박상하가 약 8백 불, 재무 홍인표가 약 1500 불을 다른 용도에 전용한 것이 드러났다.

그에 대한 불똥은 옴팍 김종학에게 쏟아졌다. 박상하는 즉시 변상하겠다고 했고 홍인표는 1년 내로 변상하겠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의 선동과 그 추종자들의 강경한 요구에 의해 총회장 김종학은 1915년 5월 1일 특별대의원회를 소집해야만 했다. 그러나 76 지방회에서 절반도 되지 않는 31 지방회의 대의원들만 참석했다. 정족수 미달로 회의를 합법적으로 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이승만 지지 대의원들의 우격다짐에 의해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곧 난장판이 됐다. 김종학은 정회를 선언하고 퇴장했다.

그러나 이승만 지지자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었다.
김종학의 해임을 의결한 다음 그들 중에서 임시 총회장을 뽑았다. 김종학을 위협하여 회계서류를 압수했고, 최종 책임은 총회장에게 있는 만큼 재무 홍인표가 전용한 금액을 대납하라고 강요했다.

김종학은 홍인표를 찾아서 변상하게 할 테니 3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으나 이들은 그 요청을 묵살했다. 

미국법정에 고소해 김종학이 공금 횡령 혐의로 체포된 게 1915년 5월 14일. 3개월 동안이나 재판이 진행됐으나 증거부족으로 무죄판결이 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9월 15일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자기 몸에 총을 쏜 것이다.

미국법정에 고소한 것은 이승만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1915년 6월 10일자 '신한민보'를 보면 샌프란시스코 중앙총회에 온 하와이 대의원의 공첩이 실려 있다. 원래 대의원회는 김종학에 대한 조치를 내부적으로 해결할 것을 의결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자기를 추종하는 대의원들을 중앙학원에 모이게 한 다음 "어찌 죄인 김종학을 징역 시키지 아니하고 공회재판으로 처치한다 하는가. 그와 같이들 하려면 다 본 지방으로 돌아가라"고 화를 냈다.  추종자들이 다시 회의를 소집하자 반대파 대의원들은 어처구니가 없어 퇴장했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경축행사.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경축행사. 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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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그의 변호사는 라잇푸트였고 피고인 김종학의 변호사는 브라운이었다. 이승만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 않고 조리가 없어 웃음거리가 됐다. 뿐만 아니라 양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 조롱의 대상이 됐다.

증언을 하는 중에 그는 엉뚱하게도 자기만이 한인 주요 인물들 중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라고 뻐겼다. 한인 노동자들을 인도하는 사람은 자기이며 그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마치 돼지 떼처럼 하와이에 이민 왔다는 말도 했다.

공개 석상에서 뱉은 이와 같은 모욕적인 언사는 법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피고인의 변호사 브라운은 반은 농으로 질문하기를 무슨 박사냐, 혹시 말(馬)박사는 아니냐고 물었다.  미국에서는 농으로 이발사를 '교수'로, 수의사를 '박사'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1915년 1월 그는 하와이 제도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며 국민회를 비난했고 임시총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의무금을 국민회에 납부하지 말고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다. 국민회 임원도 아닌 그가 위임받지도 않은 일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파는 스스로 혁명대라 칭했다. 마위전도 민회장 누구는 혁명대장으로 자원출전한 자요, 가와도 민회대표 누구는 가와도 민회장이 선봉대장으로 파송한 자요, 하와이 섬 힐로 지역 민회장 누구는 혁명대장이라 선언하고 출전한 자라고 편지에 밝히면서 임시총회의 소집을 요구했던 것이다.

혁명대는 김종학파(실제는 박용만파) 대의원을 구타하고 테러행위를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호놀룰루의 영자신문에도 자주 기사화됐다.

이승만에게 파당싸움이나 폭력행사는 새로운 게 아니었다.
돌멩이와 몽둥이가 난무하는 만민공동회의의 거리 시위에서 몸싸움을 한 적도 있고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경험도 있어 그에게 폭력은 낯설지 않았다.

1915년 6월 9일자 '호놀룰루 스타 블리틴'은 이승만이 맡고 있는 학교 소속 한 남학생의 '투서'를 실었다. 내용은 이승만이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장시켜 위협적인 행동에 나서게 했고 테러의 배후는 이승만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박용만은 하와이의 공기가 이처럼 살벌하게 돌아가는데도 이승만을 반격하지 않았다.  형제끼리 싸워선 안 되고 외부의 적을 향해 힘을 합쳐 싸워야하며 이승만과의 우정이나 동포사회의 단합을 깨는 것은 불가하다는 거였다.

박용만 파 사람들은 그의 이런 태도에 대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나 박용만은 설사 자기를 해하는 사람도 자기는 해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재판이 끝나자 이승만과 박용만의 화해를 위해 작은 회식이 마련됐다. 이승만은 두 청년을 데리고 나타났다. 두 청년을 회식장소의 거리 양쪽 끝에 세운 이승만은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 자들이 나를 모욕하고 때린다."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내달았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나 박용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해에 대한 미련을 차츰 접을 수밖에 없었다.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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