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이 학교 운동장에서 납치된 뒤 성폭행을 당했다면 학교를 설치·운영하는 지방자치단체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6부(재판장 김성곤)는 30일 학교에 방과후 컴퓨터 수업을 받으러 갔다가 김수철(47)씨에게 납치돼 성폭행을 당한 초등학생 ㄱ(10)양과 가족들이 서울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치료비와 위자료 89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이 소송의 피고는 서울시지만,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에 교육·학예 관련 사무로 인한 소송은 교육감이 시·도를 대표하게 돼 있어 실제 소송은 서울시교육청이 수행했다. 잘못은 지자체의 교육 관련 사무를 관장하는 교육청에 있지만, 교육청은 법인격(권리·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어 법적 책임은 ‘법인’인 서울시가 진다.
재판부는 “교장이나 당직교사는 어린 학생들이 등·하교 과정에서 약취·유인 등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높은 주의 의무를 기울여야 한다”며 “사건 당시 학교 교문에 사고 예방을 위한 인력이 전혀 배치되지 않았고, 당직교사도 학교 건물에 들어온 김씨를 내보내기만 했을 뿐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교장이나 교사의 조처는 ㄱ양에 대한 보호·감독의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하고, 이는 사고 발생의 원인이 됐다”며 “서울시는 학교의 교장이나 교사가 소속된 지방자치단체로서 ㄱ양과 가족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서울시교육청은 “관련법에 의해 학교 운동장을 개방해야 했고, 예산 부족 때문에 자율휴업일에 배움터 지킴이 등을 배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운동장을 개방하고 학교 공원화 사업을 추진한다고 해서 범죄 목적을 가진 외부인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감독할 학교 쪽의 의무가 면제·감경된다고 볼 수 없고, 예산 부족이나 정책적인 이유로 학교 쪽의 의무 위반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ㄱ양은 2010년 6월 자율휴업일에 방과후 학습으로 컴퓨터 수업을 받으러 갔다가, 학교 운동장 등을 배회하던 김씨에게 납치된 뒤 성폭행을 당했다. ㄱ양과 가족들은 2010년 7월 보호·감독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김씨는 1심과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돼 복역중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