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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학부모들이 만든 ‘여물점’

한만중 | 개포중 교사

영림중학교 학부모들이 또 일을 내고 있다. 이번에는 학교에 친환경 매점을 만들어서 교사인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이 씩씩한 학부모들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11년 2월 교육과학기술부 후문에서였다.

이 학교는 서울에서 최초로 내부형 공모제로 현재의 교장 선생님을 선임하였지만 교과부에서는 절차상의 이유를 들어 임용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영림중학교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뽑은 교장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단에서]씩씩한 학부모들이 만든 ‘여물점’

열악한 교육환경을 이겨내고 학교를 발전시킬 적임자로 선정된 분을 절차상의 문제로 임용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주에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영림중학교 학부모 한 분이 반갑게 인사하면서 “선생님 저희 학교에 최초로 친환경 매점을 만들었어요”라고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중학생들에게 매점은 점심 한 끼로 해결할 수 없는 식욕을 채워주는 절대 공간이다.

학생들이 학급회의나 학생회 선거에서 가장 많이 건의하거나 불평을 내놓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매점이다.

하지만 매점을 설치할 여건이 되지 않거나 관리의 어려움을 핑계로 매점을 운영하지 않는 학교가 적지 않다. 실제 전체 학교 중에 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학교의 비율은 30%를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학교를 볼 때 가장 우선적으로 설치해야 할 공간이지만 매점 설치는 여전히 후순위일 뿐인 것이다. 매점이 없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월담을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매점에서 팔고 있는 제품 중에는 제조회사가 불분명한 식료품들이 적지 않다. 파는 제품들은 탄산음료나 피자, 햄버거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매점을 운영하는 업자들은 연간 수천만원 이상의 사용료를 지불하게 된다. 수익을 얻어야 하는 운영권자의 입장에서는 이윤이 많이 남는 제품을 팔게 되는 것이다.

친환경 매점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영림중학교를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3평(9.9㎡)도 되지 않는 작은 매점 판매대를 교과부 후문에서 만난 그 학부모들이 지키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매점에 몰려드는 학생들이 사 먹는 과자와 빵, 음료수들은 대부분 유기농 제품들이다. 콜라와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를 사과주스와 식혜가 대신하고 있다.

친환경 제품으로 바꾸고 나서 처음에는 기존 제품에 입맛이 길들여진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는 일도 꽤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쉬는 시간마다 매점 앞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고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하고 출근한 선생님들도 이 매점의 주요 고객이 되었다고 한다.

영림중학교 친환경 매점은 학교 구성원들이 어떻게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사례이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교사들과 학부모, 지역사회가 서로 협력하여 학생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매점을 이윤을 얻는 공간이 아니라 좋은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교육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영림중학교 친환경 매점은 운영 방식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학부모와 지역주민이 조합원이 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매점을 운영하려는 것이다.

올해 12월1일부터 시행되는 협동조합 기본법이 5인 이상 조합원을 모으면 금융업, 보험업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의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출자자가 되어 만든 이 협동조합이 이윤보다 학생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매점을 운영하게 될 것이다.

친환경 매점으로 바꾸면서 공모한 결과 이 매점은 여물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처음 듣기에 소의 여물을 연상시키는 어감은 어색하지만 여유 있고 물 좋은 매점이라는 뜻이란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씩씩한 학부모들이 주역이 되어 만드는 여물점에서 친환경 제품을 먹고 황소처럼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학부모와 학생을 소비자로 교사를 공급자로 나누는 정책이 20년 가까이 진행되어 왔다.

이른바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다. 하지만 교사, 학생, 학부모가 서로를 대상화하는 이 정책은 갈수록 심해지는 입시 경쟁 교육과 늘어나는 학교폭력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학교를 다시 사랑과 신뢰의 교육 공동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우리 교육이 가야 할 방향이다.

가슴에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리지 말자”는 버튼을 10년째 달고 다니는 생활지도부장 선생님과 영림중학교의 씩씩한 학부모들이 새로운 학교를 통해 그 가능성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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