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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범죄’는 없다

입력 2012.09.17 19:51

  • 한만중| 개포중 교사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가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연일 있어서는 안될 온갖 범죄들이 벌어지고 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아이들은 해맑게 웃고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가해진 성폭행의 상흔은 아이와 가족뿐만 아니라 온 사회에 깊게 파여 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저질러지는 범죄라는 용어로 ‘묻지마 범죄’가 쓰인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된 묻지마 범죄로 지칭된 사건이나 잔인무도한 성폭행 사건에도 분명한 원인이 존재한다.

사회복지망이 발달한 북유럽 사회에 영국이나 미국, 일본 등에 비해 이러한 사건이 덜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극단적인 양극화와 사회안전망의 결핍이 이러한 사건을 배태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빈발하는 어린이 대상의 성폭행은 공교육의 허점과 도시 저소득·맞벌이 가정 증가 등 사회안전망 부재에 따른 결과다.

[교단에서]‘묻지마 범죄’는 없다

전남 구례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은 학교 등굣길에 나선 아이를 상대로 벌어진 경우다. 농산어촌 지역 통폐합 정책으로 등하굣길이 멀어진 아이들은 이러한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저소득층 아동의 범죄 실태 및 보호방안’에 따르면 친구나 선후배의 괴롭힘으로 부상을 입은 경우는 저소득층 학생이 28.2%인 반면 일반 학생은 14.3%였다.

해마다 학교를 떠나는 7만명의 학생 중 자신의 주변에 사회안전망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주현(가명)은 부모님이 살아계시지만 사회시설에 맡겨진 아이였다. 학교보다는 바깥 사회에서 세상을 배워버린 이 아이에게 일탈 행위는 일상이었고, 돈이 필요하면 금품을 강탈했다. 그는 이런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교무실에서 훈계를 하는 담임선생님에게 “선생님이 저를 어떻게 알아요”라고 절규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부모와 사회를 향한 이 아이의 증오를 풀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그 절망의 몸짓을 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9월4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인성교육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학생들의 정직성이 낮다고 평가하는 국민들이 51.1%에 이르고, 교사들의 80.3%가 더불어 사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아이들조차 정직할 수 없는 사회, 친구를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경쟁 대상자로 만드는 학교 구조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투영된 것일 뿐이다.

공정과 정의가 시대적 가치로 재조명되고 있지만, 사회 양극화가 교실 안까지 들어와 기회의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2010년 초등학교 학생의 학습준비물 구입비가 서울지역 공립초교는 1인당 평균 2만1800원이었지만 사립초교는 평균 4만2280원으로 거의 2배나 됐다.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학교 선택권이 달라지는 특목고와 자율형 사립고 정책을 학교 다양화 정책이라고 하지만 이는 교육기회의 형평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감안해 실시하는 사회적 배려자 전형의 경우에도 경제 여건과는 무관한 다자녀 가정 자녀들이 절반 가까이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서울지역 27개 자율고와 6개 외고에 사회적 배려자 전형으로 입학한 신입생 2240명 중 다자녀 가정 자녀가 46%(1029명)를 차지했다. 특히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 1287명 가운데 80%는 다자녀 가정의 자녀였다. 한 아이를 낳아 교육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2억8000만원 수준인 우리 사회에서 다자녀를 둘 수 있는 계층이 누구인가는 불 보듯 뻔하다.

대학 입학 전형에서는 사회 통합을 위해 기회균형선발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대학 알리미에 게재되어 있는 이 제도의 시행 결과는 씁쓸할 뿐이다.

고려대의 경우 3780명 정원 중 기회균형선발제도로 입학하는 학생은 전무하다. 정원외 선발에서 60명을 뽑았지만 이 중 28명만 등록해 등록률은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화여대 역시 3115명 정원과 별도로 뽑은 40명 중 30명만 등록했고 장애인의 경우에 10명을 뽑았으나 5명만 입학했다. 입학사정관제도가 도입되고 나서 서울의 상위권 대학의 특목고 학생 입학 비율이 증가하면서 ‘묻지마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저소득층 학생이 이들 대학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약육강식과 배제에서 길러진 사회적 증오가 묻지마 범죄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것을 우리 사회가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정책의 출발은 학교를 사랑과 배움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되는 교육에서는 자신에 대한 존중감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덕목을 체득할 수 없다.

이에 더하여 교육의 공정성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로 형식적으로나마 교육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교육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적극적인 역차별 정책이 제도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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