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교육공약’ 토론회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로 ‘자유학기제’가 채택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해 11월21일 “중학교 과정에서 한 학기를 학생들의 꿈과 끼를 찾는 자유학기제로 운영하겠다”며 “자유학기에는 필기시험 없이 독서, 예체능, 진로 체험 등 자치활동과 체험 중심의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창의성을 키우고 진로탐색의 기회를 갖게 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직인수위는 21일 2015년부터 점진적으로 시행하며 시행 학년과 방법을 시·도교육청에 자율적으로 맡긴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은 자유학기제와 유사한 ‘중1 진로탐색’을 선거공약으로 잡았고 서울은 올해부터 11개 학교가 시범운영에 들어간다.
하지만 20일 오후 서울 관악구 좋은교사운동 사무실에서 열린 ‘자유학기제,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에 모인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정병오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의 발제로 시작된 토론회에는 김무성 한국교총 정책기획국장, 손동빈 전교조 참교육실정책국장, 송환웅 참교육학부모회 부회장, 최상덕 한국교육개발원 미래교육연구실장, 이지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원이 패널로 참여했다.

지난 20일 서울 관악구 좋은교사운동 사무실에서 열린 ‘자유학기제,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정병오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가운데)이 발언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 필기시험 없이 체험 중심 교육
“목적조차 불분명” 부실 성토
고입 몰두 현실 속 효과 미지수
■ 내용 없는 공약(空約)… 개념 정의부터 차이
자유학기제 공약 내용이 부실하다는 점은 대다수의 패널이 지적했다. 어떤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지 각론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패널들이 생각하는 자유학기제의 내용은 제각각 달랐다. 손동빈 참교육학부모회 부회장은 “자유학기제가 목적으로 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태”라며 “단순히 진로교육을 의미한다면 기존의 학교에서 해온 것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무성 한국교총 정책기획국장은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섬세한 정책적 여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며 “교육정책은 아이들과 민감하게 연결되는 만큼 ‘실험’으로 추진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자유학기제를 어느 시기에,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갖고 실시할지가 쟁점이었다. 자유학기제 모델이 되는 외국 사례로는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와 덴마크의 ‘애프터스쿨’ 제도를 들 수 있다. 전환학년제는 한국의 고1에 해당하는 중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 1년간 시험이나 공부 부담없이 자유롭게 세상과 자신을 탐색하는 시간을 갖게 하자는 취지에서 1974년에 도입됐다. 애프터스쿨은 공립기초학교를 졸업하고 김나지움이나 직업학교로 진학하기 전 거쳐갈 수 있는 1년 과정의 기숙형 자유학교이다. 주로 음악, 미술, 체육 등 감성교육과 단체활동이 주를 이룬다.
정병오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은 “고등학교 1학년은 전환학년으로 운영하고 2학년부터 4학년까지 3년간 현재의 고교 교육과정을 그대로 운영하는 학교가 맞다”며 “시범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진로탐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1년 과정의 공립형 진로탐색 대안학교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위원은 “현재의 교육과정 안에서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일괄적인 진로교육을 강화할 경우 부작용이 생기므로 철저하게 희망자를 대상으로 실시해야 한다”며 “상류층 중심으로 사교육 붐이 일어나는 것만 방지한다면 중·고교 과정 중 언제든지 진로탐색을 위해 휴학을 허용하는 진로탐색 휴학제도를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상덕 한국교육개발원 미래교육연구실장은 “설문조사 결과 자유학기제의 목표가 전인교육이 돼야 한다는 게 70.8%였다”며 “아이들이 행복하고 21세기에 맞는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할 수 있도록 협의의 직업체험보다는 광의의 진로교육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최 실장은 “내신이 입시에 반영되고 집중이수제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몇몇 학생만 선택적으로 자유학기제를 실시하면 혼란이 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지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원은 “농어촌 지역처럼 기업과 연계한 진로탐색이 어려운 학교들은 우선적으로 시범학교로 지정해서 운영할 필요성이 있다”며 “처음부터 인프라를 다 갖추고 시작하기보다는 시행하면서 천천히 만들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고교서열화, 경쟁 중심 입시체제부터 깨야
특목고·자사고 등이 초래하는 고교서열화가 존재하고, 중학생 때부터 고교 입시에 몰두하는 상황에서 과연 자유학기제가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우려도 나온다. 손동빈 전교조 참교육실정책국장은 “현재는 고등학교가 이미 서열화돼 있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를 해봤자 무의미하다”며 “일제고사나 고교서열화 등 자유학기제와 충돌하는 다른 정책들에 대한 재검토가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환웅 참교육학부모회 부회장은 “학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진학을 위해서 급행열차를 타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며 “입시경쟁 완화, 교육과정 축소 등의 교육시스템 변화 없이 자유학기제를 실시한다면 결과는 비관적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단순한 직업체험보다는 소득이나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 자체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진로교육으로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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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덕 실장은 “핀란드는 고3을 졸업하면 취직을 바로 하는데 임금격차가 적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숙련도만 쌓으면 그 직업을 평생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며 “덴마크나 아일랜드, 핀란드의 외국사례를 볼 때 교육시스템만 볼 것이 아니라 노동시스템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패널들의 토론이 끝난 뒤 관중석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현직교사인 한 남성은 “안 그래도 아이들이 입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이제 진로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받게 될까 우려스럽다”며 “입학사정관제를 대비하는 등 자유학기제가 스펙을 쌓는 도구로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고 지적했다. 덴마크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한 여성은 “덴마크에서는 따로 진로교육이라는 것을 운영하지 않는 대신 모든 교과과정 안에 진로교육이 녹아있다”며 “현실은 도외시한 채 무조건 꿈만 꾸게 하는 진로교육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희망학생에 한해서만 자유학기제를 실시할 경우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는 부모의 자녀들은 또 다시 방치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