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는 그 목소리들

이대근 논설위원
[이대근칼럼]비판하지 말라는 그 목소리들

세계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대결하던 때가 있었다. 상대는 악이요, 우리는 선이오 하던 이분법의 시대였다.

그 시절 어느 한 쪽에 대한 비판은 다른 쪽에 대한 옹호를 의미했다. 그 때문에 우리 진영에 문제가 발생해도 그걸 비판하는 것은 상대 진영의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끝나면서 그런 억압의 논리는 무너졌다.

그런데 진영대결의 시대가 종식된 지 19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의 진보·보수 세력 사이에서는 이 낡은 대립 구도가 흑백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다. 같은 편끼리는 웬만한 잘못도 봐줘야 한다는 패거리 의식, 상대에 대한 적의로 우리편임을 확인하라는 압박, 자기 성찰보다는 보수를 열심히 때리는 것이 진보다운 것이라는 믿음이 그런 것들이다.

물론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한국의 진보를 보수와 일대일의 관계인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기득권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보수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진보를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를 비판의 성역으로 남겨 둬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진보는 격려와 지지, 보호만으로 성장하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는 소외된, 너무나 많은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어려운 일을 자기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런 짐을 진 진보라면 보수와 비교할 수 없는 건강성을 지녀야 한다. 진보 역시 비판에 노출됨으로써 단련되어야 하고 자기 치유력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진보는 진정 정의를 향해 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의 동맹’ 강요는 가짜 진보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진보 감시 기능을 보수언론만이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진보 비판은 별 쓸모가 없다. 진보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험담으로만 들릴 것이며 따라서 아무런 자극을 줄 수 없다.

그런데도 굳이 보수언론에 진보 비판의 특권을 부여하겠다는 것은 감시와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안이한 발상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또 그런 특권은 진보언론의 권위와 영향력도 떨어뜨린다. 침묵하거나, 한쪽 편만 들거나, 지침을 따르는 당보·기관지 같은 언론이 강력한 발언권을 갖고 이 사회를 바로잡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맥 빠진 진보언론, 누구에게 좋은 일이 될 것 같은가. 진보언론의 진보 비판은 소모적인 일이 아니다.

편들기에 익숙한 한국적 풍토에서 진보언론이 진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낯선 풍경에 당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에 스스로 진보 비판의 독점권을 넘겨주고는 진보 비판은 보수언론을 흉내내는 일이라고 비난하는 자가당착 혹은 환원론적 오류는 이해하기 어렵다.

진보언론이 주도적으로 의제를 설정하기보다 보수언론이 하는 걸 봐서 그걸 피하거나 반대로 하라며 진보언론의 공간을 축소시키고, 보수언론의 눈치나 보게 함으로써 진보언론을 보수언론에 종속시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오직 보수언론이 보는 것과 아닌 것만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 그 흑백의 단순함, 보수언론이 설정한 기준과의 차이로 진보언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보수언론 중심주의, 진보비판은 모두 보수언론 혹은 보수언론의 틀로 접근하기 때문이라는 미신, 약점을 묻어두자는 침묵의 동맹에 가담하지 않는 누구도 적인 양 취급하는 태도는 모두 그들이 규정한 보수언론의 행태 그대로이다.

진보라고 잘난 체할 게 하나도 없다.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할 용기가 없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신문은 허락받고 묻지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덧붙인다면 신문, 기자, 지식인 같은 부류에게는 왜 비판했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 지지자였지만 당원가입을 하지 않았다. 비판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였다. 그는 공산당 지지자이기 전에 지식인이었다.

신문, 기자가 하는 일은 비판하고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 어떤 비판과 물음이 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지는 물음이 던지는 무게와 깊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물음은 하찮고, 어떤 물음은 충격적이고, 어떤 물음은 까다롭고, 어떤 물음은 분수를 모르고, 어떤 물음은 불편하고, 어떤 물음은 강압적이라며 물음 자체를 평하고 시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제발 묻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마라. 누군가에 대해 어떤 문제를 물으면 안된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신문은, 기자는 허락받고 묻지 않는다.

<이대근 논설위원 gr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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