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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 미안하다, 태극 소녀들아

김병지
기사전송 2010-09-2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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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추석들 잘 보내셨나요? 이번 추석에는 기분 좋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우선, 우리 경남FC가 수원 원정 징크스를 깨고 매우 중요한 승점 3점을 획득했습니다. 올 해는 시즌이 길게 갈 것 같아 개인적으로 기대가 큽니다. 11월에 경남FC의 또 한번의 돌풍을 기대해주세요!

그리고 또 하나, 뜻 깊은 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태극 소녀들의 U-17 월드컵 결승 진출이었습니다. 17세 이하, 그리고 여자 축구라는 변수와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성과는 대단한 성적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FIFA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주는 권위만으로도 떨었던 한국 축구가 아니었습니까? 세계의 벽을 누구보다 실감했던 저였기에 TV를 통해 전해지는 우리 딸 같은, 여동생 같은 태극소녀들의 선전은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김병지] 미안하다, 태극 소녀들아

수영장에서 휴식을 즐기며 결승전 승리를 다짐하는 U-17 여자 축구대표팀 (사진=연합)

어린 친구들이 결승 진출이라는 성과를 내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다행이라면 한달 전 언니들이 세계 무대에서 해냈다는 사실이 U-17 대표팀에게도 용기와 꿈을 심어주는 상호 작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차가 많지 않은 언니들이 해냈다는 데서 자신들도 큰 무대를 통해서 일구고 싶은 목표치가 어느 때보다 컸을 것입니다. 한국 여자 축구의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 꿈이 더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간간히 현장에서 느낀 여자 축구의 현실은 이번 결승 진출이라는 영광이 주는 빛의 그림자만큼 어둡습니다. 여건 면에서는 제가 축구를 시작하던 30년 전의 남자 축구와 비슷합니다. 최근 남자 축구는 자신이 좋아서 시작하고 집안의 지원이 받쳐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 지만 여자 축구는 여전히 저변도 적고, 환경도 열악합니다. 진심으로 운동을 시키고 싶은 딸을 축구 선수로 키우는 부모는 극소수입니다. 정상적으로 공부하기 어려운 아이들 중 재능이 있는 소녀들이 축구 선수로 성장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축구교실에도 어린 여자 아이들이 운동을 하러 옵니다. 6, 7세의 경우에는 여자애들이 또래에 비해서 더 특출 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부모님은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혹은 사회성을 키우기 위한 차원에서 운동을 시킬 뿐이다. 흥미롭다면 여자 축구의 연이은 성과가 그런 부모들의 생각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힘든 상황에서 일궈내는 소녀들의 영광이 자라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축구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셈이죠.

여자 축구가 어렵다는 것은 골키퍼 포지션을 봐도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골키퍼만 좋다면 훨씬 더 나은 경기력이 보여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많습니다. 기본적인 부분에서의 문제로 실점하는 상황이 특히 잦습니다. 여자 축구는 골키퍼가 차지하는 비중이 남자 축구보다 큰데, 필드 플레이어가 세계 정상급 수준으로는 가는데 비해 골키퍼의 수준이 따라주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골키퍼 부분의 문제는 체계적인 교육의 부재라 할 수 있습니다. 전 문적인 교육을 꾸준히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자도 중,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에서 전문 지도자 아래서 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동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 좋은 지도자를 갖췄느냐의 여부는 축구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여자 축구는 지원 체계가 열악하다 보니 대부분의 지도자들 일, 이백만원의 월급으로 고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축구계의 문제인 지도자들의 나쁜 관행들이 정리가 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여자 축구에서도 지도자들이 직업 의식을 갖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같은 현실이라면 전문 지도자들의 접근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숙소 미팅룸에서 그간 일본의 경기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함께 보며 일본 전력을 탐색하는 U-17 여자 축구대표팀 (사진=연합)

이 문제는 당장 해결하기 쉽지가 않은데, 당분간은 여유가 있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의 지도자들이 어느 정도 희생을 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저는 현역 생활을 은퇴하면 프로 무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기보단 여자 축구와 같은 아마추어 무대에서 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선수 생활 동안 제가 받은 것들에 대한 작은 환원이라고 생각합니다. 1년 가량은 전국의 남녀 청소년 선수들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저와 뜻을 모을 수 있는 축구인들이 늘어난다면 좋겠지요?

시설에 대한 지원도 필요합니다. 지난 겨울에 미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축구 면이 5개 가 있는 공원이 있었습니다. 그 공원은 1주일에 2-3일 정도는 여자 팀들이 각 연령별로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여자 팀이 공원을 이용하는 날은 남자 팀은 절대 공을 찰 수 없게 제도적으로 보조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축구의 보급과 육성을 모두 신경 쓴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여자축구가 생활화되지 못했고 시설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니까 외면 받기 십상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번 U-17 여자 대표팀의 놀라운 성과 앞에서도 고개를 들기가 어렵습니다.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사실 발 아래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살얼음판이기를 알기 때문이랄까요. 언제 무너져 버릴 지 모르는 살얼음판처럼 이 성과도 금세 잊혀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성과에 박수를 보내고 찬사를 보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열악한 여자축구의 환경이나 지원이 개선되는 계기가 되도록 모두가 뜻을 모았으면 합니다.

최우선적으로 건의를 한다면, 여성 전용 축구 센터가 필요합니다. 부지를 구하고 예산을 모으는 것 모두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여자 축구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성과를 냈잖아요. 어린 여자 선수들, 그 리고 뜻 있는 소수 지도자들의 노력은 충분했습니다. 이제 공은 위에 계신 분들에게 넘어왔습니다. 대한축구협회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여자 선수들을 위한 파주 NFC와 같은 축구 센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자 선수들이 갖는 특수성에 맞는 시설이 있어야 앞으로도 이 같은 성과를 꾸준히 낼 수 있습니다. 지금처 럼 소수의 재능 있는 선수들의 활약에만 기대서는 언제가 여자 축구가 과거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 자명합니다. 영광을 보고 박수만 쳐줄 것인지, 꿈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준비해줄 것인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딸 같고, 조카 같은 아이들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팀이 많아서 미래에 좋은 급여에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고, 당장 큰 격려금을 줄 수도 없구나. 축구인이 내 자신도 파이팅을 함부로 외칠 수 없어 씁쓸하다. 길 을 제시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 실망하진 말아라. 지금 너희들이 선 위치는 아무나 설 수 있는 게 아냐. 충분히 즐기고, 상 대보다 한발 더 뛰어서 우승이라는 성과를 내어 다오. 나도, 내 주변의 다른 축구인들이 반드시 너희들의 노력에 대해 작게나마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할 테니까. 일요일 새벽, 꼭 승전보를 전해주길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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