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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을 배려하는 용기와 개인을 말살하는 악행

노명우 | 사회학자

개인과 전체주의

개인에 대해 언급하려면 심지어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사소한 데 관심을 갖는다는 깔보는 눈길과,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자의 자기변명이 시작되었다고 의심하는 눈초리 사이에 끼어 있기 마련이다. 개인에 대해 글을 쓰려면 현명하기도 해야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만하지!”라는 경고를 통과할 묘책을 찾아내야 하고, 개인의 구구절절한 사연들로 가득한 여성지 특유의 수다의 늪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인지 특히나 사회과학은 개인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 한다. 개인을 공적 의제로 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강해질수록, 방송국에 소소한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공적 세계에서 개인이 의미 없어지면, 사람들은 집요하리만큼 사적인 개인에 집착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개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엄숙한 세계와 개인이 과잉으로 넘치는 사소한 세계라는 양 극단 속에서 처량하게도 진자운동을 한다.

우리가 매일 벌이는 진자운동을 사회도 되풀이한다. 지구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개인은 영웅뿐이다. 아예 개인이라는 단어조차 무의미하던 시절, 영웅이 아닌 사람들은 그저 무명씨에 불과했다. 무명씨들은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투표권을 얻고 나서야 무존재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 세상의 모든 무명씨가 개인이 되는 순간, ‘비영웅-개인’을 위협하는 괴물이 등장한다. 그 괴물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같은 극단의 사례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전체주의의 그림자는 구체적인 질을 양적 범주로 환산시키는 데 능숙한 환원의 논리 속에도, 집단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공고하게 하는 집착증에도, 보편에서 벗어난 특수한 존재를 견디지 못하는 신경증 속에도,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집단주의에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에도 살아있다.

전체주의의 망령은 집단화를 강요한다. 한 개인은 집단의 구성원이어야만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난다. 집단이라는 범주로 포섭되지 않은, 혹은 집단과의 기계적 동일화를 거부한 개인은 위험한 존재이다. 개인은 온갖 종류의 집단의 압력 속에 노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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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뜻에 거역하는 개인은 반역자다. 대의를 거슬리는 개인은 뿌리뽑혀도 상관없는 사소한 존재일 뿐이다. 전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별적인 것을 사소한 것과 동일하게 여기는 전체주의의 쓰나미에 의해 개인이 쓸려갈 때, 아도르노는 개인이라는 실마리를 다시 붙잡았다. 그 실마리는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라는 너무나 적절한 부제를 달고 있는 <미니마 모랄리아>(길·2005)에 담겨 있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는 “개인이 몰락하는 시대에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개인의 경험은 은폐되었던 많은 것을 인식”(31쪽)하게 해주리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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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 대한 관심이 “나만 소중하다”는 이기심의 온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주목과 개인을 침탈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고발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개인에 주목하는 <미니마 모랄리아>와 전체주의의 기원을 묻는 <계몽의 변증법>이 비슷한 시기에 쓰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니마 모랄리아>와 <계몽의 변증법>이 만날 때, 개체 발생과 계통 발생은 유사하다는 무시무시한 깨달음에 도달한다. 개체는 계통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가난한 개인에게 당신의 가난은 오로지 당신의 부족한 능력 탓이라고 힐난할 수 없고, 부유한 개인의 부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의 증거라는 주장도 억지스러워진다. 분명 개인은 계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발견적 원칙’이다. (사르트르 <변증법적 이성비판> 나남출판사·2009) 개인의 가능성은 사회의 가능성과 동일하다. 월급쟁이 회사원이 최고 경영자로 승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차단은 부가 세습되는 사회가 허용하는 제한된 가능성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개인 회사원의 불가능성 속에서 그 개인이 속한 사회가 개인에게 허용하는 가능성의 진폭을 가늠할 수 있다.

개체와 계통의 유사성을 생각하는 한, 모든 것이 개인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능력주의는 설득력을 잃는다. 만약 우리가 최종 책임을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몫이다.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이기심이 자란다고 협박하지만, 그 협박을 넘어 개인에게 눈길을 돌릴 때 우리는 최종 책임의 담지자인 사회와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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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살해된 용산참사 이후 재판이 벌어졌다. 재판에 회부된 “전체의 이익에 반대되는 떼거리 집단” 중 한 개인의 말을 또 다른 개인은 이렇게 전한다. “자신들 이외에는 자신을 변호해줄 사람이 문자 그대로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법이라는 거대한 존재, 철벽같은 국가권력을 상대로-나의 살아갈 권리, 말할 권리, 부당하게 처벌받지 않을 권리를 존중해주십시오-하고 직접 말을 해야 하는 개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어떤 식으로 공기를 울리는지, 나는 똑똑히 들었다. 변호인이 없어도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재판장은 말했다. “그렇다면 돌아앉게 해주십시오. 나는 변호인이 없습니다. 나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실천문학사·2009, 285쪽)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설상가상 보호하기는커녕 국가가 악행의 근원일 때 국가로부터 돌아앉은 개인은 대체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국가가 개인을 돌보지 않을 때 이기주의로 후퇴한다. IMF관리체제 이후 한국인의 상식은 적어도 그렇다. 국가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한국인은 오직 부만이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한 이기적 상식이 해결책은 아니다.

개인의 먹고 살 걱정을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는 개인을 대리할 자격이 없다. 개인은 국가가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을 해결해준다는 믿음에 따라 많은 권리를 국가에 양도했다. 개인의 권리를 양도받은 국가가, 국가에 귀속된 과대한 권리는 당연하고 개인은 국가에 대한 의무만을 수행하는 개체라 주장한다면, 국가는 정당성을 상실한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만약 그 이익집단이 소수 개인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면 그때부터 그 이익집단은 국가가 아니라 패거리라 불러야 한다. 따라서 개인이 보호받지 못하는 시대의 해결책은 개인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정상화이다.

자본은 개인주의를 탈맥락화하고, 개인주의를 개인 간의 경쟁과 차별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개인 간의 경쟁으로 포장된 탐욕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면, 자신의 배꼽만을 쳐다보는 탐욕적인 개별자로 세상은 넘쳐나기 마련이다. 자신의 배꼽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탐욕은 개인을 파괴하는 또 다른 위험요인이다. 개인은 한편으로 득세하는 국가주의에 의해, 또 다른 한편으로 탐욕을 선동하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탐욕을 선동하는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면, 개인은 인격의 거처가 아니라, 탐욕의 거주지일 뿐이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오히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무명씨로 강요하는 악행의 근원일 때 이를 목격한 사람은 개인주의로 후퇴한다. 하지만 퇴행한 개인주의가 해결이 아님은 분명하다. 국가의 악행이 지속되는 한,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 한, 국가를 대신해 개인이 자신을 완전히 고립적으로 보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차라리 순진하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라는 자조의 철학은 보험회사가 손님을 유혹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뼛속까지 이기적이나 탐욕적이지 않은 사람은 이기심을 발현하기 위해 타인과 연대한다. 소중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개체를 둘러싼 계통에서 찾아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고려하지 못하는 계통의 논리는 허무하다. 개인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개인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개인을 구원할 수 없다. 행복을 느끼는 촉수는 전체가 아니라 개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관심은 나의 이익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작은 단위 속에서 반복되는 사회라는 커다란 단위에 대한 생각과 연결된다. 개인에 대한 관심을 나의 이익에 대한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개인을 언급할수록 탐욕스러워지지만 자기 속에서 사회를 발견하는 사람은 개인을 언급할수록 품이 넓어진다.

모든 개인이 소중한 관심을 받는 사회는 품위 있다. 재산과 권력은 잘난 척을 낳지만 품위를 갖고 있는 개인은 그리고 사회는, 배려를 제일 덕목으로 삼는다. 품위 있는 사람의 혀에선 감동의 언어가 나오지만, 뱀처럼 갈라진 혀를 숨긴 채 이익만을 쫓는 자의 입에선 독이 뿜어져 나온다.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개인도 존중 받지만, 혀를 날름거리는 세력이 권좌에 오른 사회에 똬리를 튼 뱀들은 매일매일 개인을 자신의 아가리 속으로 빨아들인다. 개인은 단순히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품위 있는 사회를 원한다. 개인은 품위 있는 사회 속에서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산에서 개인들은 외쳤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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