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동에서 8년째 상가에 세들어 저울 가게를 해온 장승순(54)씨는 최근 날벼락같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지난 2월7일 설을 쇠고 난 뒤 가게에 들렀더니 2층짜리 상가 건물이 통째로 헐려 있었다. 장씨의 가게에 보관 중이던 저울 부품과 금형 틀 등 약 3천만원어치의 물품도 온데간데 없었다.
장씨는 ‘도림 제 16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 구간’에 있는 상가에서 2003년 7월부터 가게를 운영해왔다. 장씨의 가게는 지난해 8월 감정평가에서 1100만원 정도의 보상금만 책정됐고, 그는 건물 철거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장씨는 재개발조합을 찾아 ‘무단 건물 철거’에 항의했지만, 조합은 “건물주가 ‘건물이 비었다’는 공가확인서를 써줘 철거한 것일 뿐”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건물주인 정아무개(80)씨는 세입자의 동의 없이 공가확인서를 써준 이유에 대해 “조합이 ‘서류를 작성해야만 이주비를 대출해줄 수 있다’고 해 아무 생각 없이 써줬을 뿐 철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자신의 가게가 입주한 건물이 헐리는 동안 철거업체, 조합, 집주인 어느 누구로부터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왜 용산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고 올라가 싸웠는 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 역시 같은 지역에서 인테리어 가게를 해온 정기택(54)씨도 지난해 12월 세들어 있던 1층짜리 건물이 느닷없이 철거되는 일을 겪었다. 간판 재료와 에어컨 등 약 1500만원어치의 물품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2000년 11월부터 이곳에서 영업을 해온 정씨도 보상금이 만족스럽지 않아 철거에 반대하고 있었다. 정씨는 재개발조합에 가서 항의했지만 “월세가 7년 간 밀려 있었고 건물 역시 조합의 소유로 넘어와 철거는 정당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정씨는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과 재개발조합장 김아무개씨에 대한 형사고발을 계획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16구역 주택재개발정비 사업 과정에서 재개발조합과 철거업체가 이주에 반대하는 세입자들의 가게와 건물을 막무가내로 철거해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재개발조합 쪽은 “장씨 건물의 경우, 기존 건물주의 동의를 얻어 영등포구청에 (건축물 철거를 위한) 멸실신고를 했고, 정씨는 월세가 밀린 상태에서 건물을 무단 점유해왔기 때문에 철거에 문제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주에 반대하는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명도소송을 거치지 않고, 건물을 철거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용산참사를 겪은 뒤 2009년 5월 개정된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은 제49조에서 ‘손실보상이 완료되지 않은 건물에 대해서는 세입자 역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권정순 변호사는 “명도소송에서 조합이 승소하지 않은 이상 엄연히 세입자에게 합법적인 사용 소유권이 있고 이런 상황에서 철거는 불법”이라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세입자가 작성해야 할 ‘공가확인서’를 집주인에게 대신 받고 세입자에게는 어떤 통보도 하지 않은 채 건물을 철거한 조합장은 건조물침입죄와 재물손괴죄 혐의로 고발 대상이다”고 덧붙였다.
건물이 헐린 세입자들은 빈 건물이 아닌데도 재개발조합의 건축물 멸실신고를 받아준 영등포구청에도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구청이 멸실신고 과정에서 꼼꼼히 공가확인서 등을 검토했어야 하는데 관리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실제 영등포구청은 취재가 이뤄진 지난 2일까지도 세입자 동의없이 건물이 마구 철거된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등포구청 주택과 관계자는 “건축법상 건물주가 멸실신고를 해오면 접수해주는 것일 뿐 구청이 정말 건물이 비었는지를 확인하고 접수할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개발 지역 철거민 권리 보호 단체 ‘나눔과 미래’ 이주원 국장은 “구청이 법을 위반하고 멸실신고를 접수해준 것은 아니지만 좀더 확실하게 확인해 철거민들의 재산피해를 막았어야 한다”며 “용산참사 이후 재개발 과정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은 상황에서 여전히 지자체 공무원들이 안일한 인식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에 동의하지 않은 주민들의 건축물이 함부로 철거되는 일은 지금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은정 민주노동당 119민생희망운동본부 부장은 “2008년 상도동과 2009년 아현동 재개발 사업 때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2011년에도 똑같은 일이 도림동에서 벌어졌다”며 “서울시에서 행정지침을 마련해 건축물 멸실신고 과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지역에서는 건물을 강제로 철거당한 이들 외에도 보상비 문제로 조합과 갈등을 겪고 있는 상인 20여명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정동훈 ‘도림 16구역 재개발 상가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꼭 화염병을 던지고 시위를 해야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며 “강제 철거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주장했다.
‘서울 도림동 제 16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은 도림동 일대 53,378m² 구간에 8개동의 아파트 단지를 짓는 사업으로 2009년 12월31일 관리처분인가가 났다. 철거는 삼오진 건설이 맡고 있다. 지에스 건설이 시공사다.
글·사진/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