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12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탄핵을 주도했던 국회의원들은 ‘승리의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미소 가득했던 얼굴에 짙은 근심이 드리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회 의석수만을 믿고 힘을 과시했지만, 민심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의 ‘무리수’에 민심은 등을 돌렸고 탄핵 주도세력들은 2004년 4월15일 18대 총선에서 ‘참혹한 패배’의 주인공이 됐다.

정치에서 힘의 과잉은 탈을 부른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이 아닌 힘의 우위를 앞세운 밀어붙이기 전략으로 목표를 쉽게 이루려다보면 ‘무리수’로 이어진다.

여야가 서로의 위치가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에서도 새해 예산안만큼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접점을 찾고자 끝까지 노력한 것은 ‘바람직한 정치문화’를 이루려는 뜻도 있겠지만 예산안의 기본 속성인 ‘승자의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사진 가운데) ⓒ연합뉴스  
 
새해 예산은 얇은 유리판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사안이다. 서로 갖겠다고 다투다가는 유리판이 금이 가고 깨질 수밖에 없다. 욕심을 부린 이들은 그 파편에 상처를 입게 된다. 예산은 여야가 대립하는 사안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299명 국회의원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안이다.

여당 의원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도 있다. 여야가 새해 예산안을 합의처리하거나 합의에 준하는 처리과정을 밟을 경우 새해 예산에 대한 평가와 책임 역시 여야가 나눠 갖는다.

그런데 특정 정당이 예산안을 강행처리하면 승리의 기쁨도 잠시, 엄청난 ‘후폭풍’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예산안의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면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밖에 없고 힘 있는의원들의 예산 쟁탈전이라는 ‘추악한 뒷모습’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한나라당은 12월 8일 유혈이 낭자한 폭력사태를 빚으면서까지 새해 예산안 처리에 성공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부실심사’의 호된 부메랑을 경험하고 있다. 한나라당 예산안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곳곳에서 무리수가 드러난다.

우선 ‘엄마의 마음’을 무시한 여당의 행보는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아가와 어린이에 대한 엄마의 마음, 그들을 돌봐주고 보살펴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과 배치되는 예산안이 편성됐다.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은 “날치기 통과된 수정 예산안에는 영·유아 필수예방접종 사업 확대를 위한 예산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A형간염 백신지원 예산 62억원도 전액 미반영됐다”고 지적했다.

 

   
  ▲ 10일 오후 서울시청광장에서 참여연대 회원들이 한나라당의 2011년 예산안 날치기 과정에서 실종된 복지예산을 알리는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참여연대는 “국가가 보조하고 있던 ‘결식아동급식지원’ 예산(방학 중 결식아동 급식 지원 사업)이 2011년 ‘0’배정, 즉 전액 삭감된 것을 확인했다. 결국 작년, 올해 국비로 방학 중 급식을 지원 받던 아이들은 급식이 끊어지게 돼 밥을 굶게 될 큰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우려했다.

영·유아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비용과 배고픈 아이들에게 제공할 급식비 지원액이 삭감됐다는 점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집권 여당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4대강 정비사업에 9조 3300억 원(수자원 공사 관련 예산 포함)에 배정한 것을 비롯해 이명박 대통령 형님인 이상득 의원의 ‘형님예산’이 대폭 증액되면서 논란을 자초했다.

   
  ▲ ⓒ조계종 총무원  
 
심재옥 진보신당 대변인은 “4대강에 쏟아 부은 날치기 예산의 결과로 결국 12세 이하 영유아 필수예방접종과 결식아동 지원금이 전액 삭감됐다”면서 “필수예방접종 국가부담의 의무를 져버리고 굶고 있는 40만 결식아동의 밥까지 빼앗다니, 정부여당의 개념 없는 '미친 예산'”이라고 비판했다.

심재옥 대변인은 “날치기 예산으로 복지와 민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이상득, 박희태 의원 등 권력 실세들은 지역구 예산을 스케일 크게 챙겨갔다. 복지에 쓰여야 할 국민의 세금이 정권 실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강탈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계가 역점을 뒀던 사업인 ‘템플스테이’ 예산이 삭감되자 불교계가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것도 한나라당은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종교계는 4대강 사업에 대해 우려하면서 목소리를 여러 경로로 전했지만, 이것 역시 무시됐다.

조계종과 원불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생명윤리위원회) 등은 10일 성명에서 “국민의 마음과 동떨어진 정부·여당의 소통부재의 결과가 예산안 통과로 나타났다. 정부여당은 국민과 종교계의 간절한 바람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해버렸다. 이는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에 대한 종교계의 충정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우려했다.

   
  ▲ 이명박 대통령 형님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 박희태(사진 왼쪽) 국회의장.ⓒ연합뉴스  
 
한나라당은 예산안 후폭풍과 관련해 야당에 책임을 돌리고는 있지만, 보수신문에서도 비판이 나오는 실정이다. 조선일보는 10일자 1면 기사에서 “예산안에 대한 최종 책임을 져야 할 쪽은 여권 지도부 전체”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한나라당은 안건 처리 때마다 야당에 끌려 다녔던 과거와 달리 '이번만큼은 통괘하게 밀어붙였다'며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여당이 이번 속전속결로 처리한 예산안을 들여다보면 국정을 맡은 세력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이 부족했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까지 예산안 통과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나서자 한나라당은 당혹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배은희 한나라당 대변인은 “오늘 몇몇 언론에 한나라당이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던 예산 중의 일부가 누락된 것이 보도됐다. 이 누락된 예산들은 야당의 지연작전 속에서 국가예산을 회기 내에 처리하기 위해 진행하던 중 실무선에서 실수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조사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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