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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d Editing @2012.07.26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폐허가 된 경희궁 복원 착수 시점은 1988년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으로나마 복원이 완료된 시점은 2002년이었다. 모두 대한민국에 국제적 이베트(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가 있었던 때다. 그리고 그 14년이라는 시간 가운데 '서울역사박물관'이라는, 건축계를 넘어 역사학계, 문화계까지 1990년대를 뜨겁게 달군 이슈가 있었다.
서울시립박물관 건설논란 경희궁 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경희궁 글을 참고하는 것으로 하고 그 중간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선 대지에 대한 이야기만 해보면 이 대지는 현대건설이 사옥이나 APT 개발 용지로 계획하기도 했을 만큼 입지는 정말 좋다. 그래서 이 땅을 현대건설로부터 매입한 서울시 뿐만 아니라 예술의 전당 건립 후보지(결론적으로는 우면산 자락에 처박히기는 했지만)를 포함하여 정부 각 부처에서 노린 전력이 있는 노른자위 땅이다. 어쩌면 이 터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제대로 된 발굴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서울시가 '서울시립박물관 및 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발표를 한 건 기선제압의 의미가 컸다. 서울 도심의 민감한 부지 대부분이 그랬듯 이 부지도 역사적, 건축적, 문화적 접근보다 정치적 접근이 먼저 이루어졌다. 서울시는 우선 강건희 교수에게 '서울시립박물관 및 미술관 건립을 위한 타당성 연구용역'을 맡겼다. 강건희는 전문 발굴 조사팀에 의한 철저한 발굴조사를 건의했고 결국 단국대 정영호 교수팀이 발굴조사를 맡았다. 조사 결과는 숭정전 자리를 제외한 기타 지역에서는 보존할 만한 별다른 유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결국 서울시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70,000여평 전체에 대한 복원보다는 그 중 일부인 숭정전 주변 29,000평 정도만 복원하고 나머지 부분에 문화시설 건립과 함께 옛 모습대로의 궁전 뜰로 꾸며 고풍어린 시민문화 휴식공간으로 조성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결국 강건희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부지에 야외조각장, 박물관, 미술관을 건립하고 숭정전을 중심으로 한 경희궁 건물 몇 채를 복원하는 마스터플랜을 제안했다(-건축가, 1992년 8월호(통권121호)-). 1986년 6월 강건희가 제안한 마스터플랜(위 이미지)을 보면 박물관과 미술관은 경희궁의 주요건물이 앉혀진 북서-남동축 방향에 맞춰져 있다. 그리고 경희궁 배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정전인 숭정전까지 접근하는 어도(御道)가 ㄴ자로 꺽여져 있는 건 반영되지 않다. 다만 경희궁지와 주변 도시조직이 만나는 가장자리에 문화시설을 앉힘으로서 공간적으로 완충 역할을 부여했다. 이후 몇 차례의 발굴조사와 자문회의를 거쳐 1987년 11월 30일 김종성&서울건축이 1차 설계안을 발표했다(위 이미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과 유사한 배치를 하고 있지만 건물로 진입하는 정면성은 지금의 정 동쪽이 아닌 이건된 흥화문이 있는 남서쪽 방향을 하고 있었다. 이후 서울건축은 김원&광장건축이 작성한 '기초프로그램 연구'에 기초하여 사용 대지면적을 13,104㎡에서 10,624㎡로 줄이는 재설계안을 1991년 9월 30일 발표했다. 하지만 방향성은 여전히 흥화문이 놓여 있는 남서쪽을 향해 있었다. 최종적으로 서울시립박물관&미술관의 정확한 프로그램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1993년 11월 29일 착공됐다. 최종 규모는 경희궁 면적을 포함하는 99,600㎡ 크기의 대지에 건축면적 6,210㎡, 연면적 19,358㎡(전시면적 6,524㎡, B1~2F)로 결정됐다. 건축물 자체는 1997년 준공됐다. 하지만 실질적인 개관을 위해 다시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에 맞추기 위해 개관날짜가 먼저 정해졌고 남은 기간이 개관준비를 위한 시간이 됐다. 그리고 2002년 5월 21일 개관했다. 건축물이 착공된지 9년 만에 박물관 내외부가 모두 공공에 개방된 것이다. 2002년 완공된 실내설계에서 전시개념은 Giovanni Bulian, 설계전반은 Amedeo Schiattarella, 상세설계는 Corrado Terzi 등이 맡았다. "1997년에 완료된 전시계획(금강기획)과 현 전시공간과의 가장 큰 전시개념의 차이를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하나는 구획된 방대 열린 공간이라는 공간적 개념과 다른 하나는 유물의 가변성을 고려한 범용디자인 대 유물 중심의 맞춤디자인 개념이다. ...(중략)...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공간의 벽이 허물어져 시원하다. ...(중략)... 대부분의 진열장과 패널들은 공간에 놓여있으며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그 사이를 오가며 관람을 한다. 전시의 방향성은 관람자에 의해 인지되고 예상되며 결정된다. 전시 관람의 동선은 계획자에 의해 제시된 경로가 있지만 관람자에 의해 선택된다. 이러한 관람의 움직임은 방으로 연속되며 관람자가 전체공간을 읽을 수 없이 강제적으로 유도되는 관람 형식에 비해 심리적 쾌적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박물관의 피로를 훨씬 줄일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다만 이런 전시의 경우 전시품들이 산재해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관람자를 위해 중요한 전시물을 어떻게 잘 보고 가도록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의 핵심이 두 번째 사항인 유물 중심의 맞춤디자인에 있다." -Criticism: 서울역사박물관, 그 탄생의 무리수와 극적 전환의 해법찾기, 이한기, PLUS0207(통권183)- 건물 배치가 어떻게 됐든 그 건물이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는 도시역사박물관으로서의 성격과 함께 서울의 역사를 조명하든 어떻든 확실한 건 서울역사박물관이 경희궁 터를 밟고 올라섰다는 것이고 이 자체만으로 박물관은 건립발표 이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그럼 이제 논란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박물관 설계를 주도한 김종성의 변(變)이다.
"7만여평에서 3만여평으로 줄어든 지금의 경희궁地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상이 절름발이 복원을 통한 과거로의 회귀일 수는 없다.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이, 서울도 유기적인 발전과 문화유산의 보존을 슬기있게 병행하여 옛것과 새것이 서로 빛날 수 있는 도시라야 한다. 21C를 눈앞에 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숭정전 경역을 중심으로 학술적으로 고증이 가능한 몇몇 주요 전각의 추가 중건을 통하여 사적공원의 성격을 강화하고, 역사적 양식과 대조하되 서로의 위계를 존중하는 현대건축의 시립박물관, 미술관을 창조함으로서, 우리의 내력을 음미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산 역사의 장을 만들어 내는 일인 것이다." -경희궁지와 서울시립박물관, 미술관 건립, 김종성, 건축가 1992.8월호(통권121)- 시립미술관 및 박물관 건립 반대 입장을 들어보자.
-지금 경희궁지에 박물관을 지어서는 안되는 이유, 김동욱(경기대교수), 건축가 1992.8월호(통권121)- 논란의 요지는 '역사적으로 고증조차 힘든 사라진 건축을 복원 해야 하는가'와 '그래도 철저한 발굴을 통해 경희궁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김종성이 설계한 건축물이 종로에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어떻게 보면 현재 광화문 광장보다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 가로인 종로에서부터 ㄴ자로 꺾여 들어가는 어도(御道) 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마치 일제가 근정전 앞을 가리고 총독부를 지은 것에 비교할 만한 문화적 파괴 행위라는 주장이 있었다.
저기서는 어도(御道)를 열고 여기서는 어도(御道)를 막고 서궐도안(경희궁도)를 바탕으로 경희궁의 원래 모습을 복원한 지도(위 이미지)와 현재 서울의 지도를 바로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사이트가 있다(디지탈 한양 뷰어). 이 사이트에서 보여주는 비교가 맞다면 경희궁은 광화문로를 중심으로 새문안길로 바뀌는 종로에 맞춰 흥화문을 놓고 전설사를 통과하여 익위사에서 ㄴ자로 꺾여 현재 숭정전으로 진입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그 도로의 폭이 넓어져 돈의문(서대문)으로 꺾여진 새문안길(아래사진)의 선형이 더 큰 위계를 가지고 있지만 과거 한양을 동서로 관통하는 종로의 서쪽 끝은 서대문이 아닌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임에는 틀림없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규모가 축소되고 나서야 궁의 정문을 남문인 인화문에서 동문인 대한문으로 바꾼 덕수궁(경운궁)까지 포함된 서궐 영역에서 한양의 도시구조와 가장 크게 대응하고 있는 건 바로 흥화문이라 할 수 있다. 즉, 흥화문은 종로의 서쪽 앵커(Anchor)임과 동시에 경희궁과 덕수궁을 합한 서궐영역의 정문인 셈이다. 김종성이 설계한 서울역사박물관은 대략 흥화문 다음 영역인 전설사 그리고 그 북쪽에 있었던 경현당, 시강원 자리에 앉혀져 있다. YS정부가 광화문로에서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어도를 깔고 앉아 있었던 조선총독부청사를 허문 시기는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 15일. 하지만 2년 뒤인 1997년에는 또 다른 어도를 우리가 결정한 건물이 깔고 올라섰다. 물론 주무부서가 다르니까 같은 인과관계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보단 하나의 어도는 온전함을 향해 가는 복원 사업의 시작을 알리기 위함이었지만 또 하나의 어도는 적당히 그 정도로 끝내고 덮어두자는, 어느 누구도 승자일 수 없이 모두가 지친뒤 쓱 들어서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차이가 더 크게 작용했다. 그렇다고 나의 관점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유적도 남아 있지 않은 경희궁을 완전 복원하자는데 있는건 아니다. 만약 우리네 옛 건축이 목조가 아닌 석조여서 그래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처럼 -이러한 유적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성기때 모습을 머릿 속에 그리는 것도 그렇게 녹녹한 정신적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기재가 있다면 그 폐허로라도 남겨두자고 얘기할 수 있지만 우리네 유적은 그것조차 쉽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남긴 유적은 폐허도 아닌 방치된 공간으로 남아 그곳을 방문한 어느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지 못하는 빈 터가 될 확률이 높다. "한국건축의 유적은 서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서양의 고대 유적지 발굴 현장에서 볼 수 있듯이 Theodor Adorno가 갖고 있는 유적의 구체적인 이미지는 무너진 벽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는 '오래된 단벽에 대해 느끼는 기쁨'을 만낀한다. 무너진 담벽에 '과거의 현실적 고통'이 '아로새겨' 있다는 것이다(-Aesthetic Theory, Theodor Adorno, Continuum-). -감각의 단면-승효상의 건축, 배형민, 동녘-
'생존의 문제'가 아닌 '공존의 문제'로 하지만 이 모든걸 고려하더라도 현재 그 자리에 올려진 서울역사박물관의 모습은 아니다. 내가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건 김종성의 안이 전통적이지 못하다, Mies van der Rohe의 언어를 한국의 미와 적절하게 섞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는 부분에 있지 않다. 난 그의 안이 서울역사박물관이 깔고 앉은 땅의 의미 -그 땅에 유적이 남아있든, 남아있지 않든- 와 그 어떤 관계도, 어울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안은 보이지 않는 흔적,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는 흔적은 차치해 두더라도 지금 복원된 경희궁의 일부와 조화를 이루고자 시도한 모습이 전혀 읽히지 않는다는데 있다. "기둥이 특이하다. 국제주의 양식에서는 전체를 철골로 노출시키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아래 절반 정도를 분홍색 화강석이 받치면서 주초를 높이 올린 것처럼 되었다. 경회루로 대표되는 궁궐 건축에 많이 쓰는 기법인데, 옆에 있는 경희궁을 맥락의 주요 기준으로 삼아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이다. 이 기둥이 받치는 복도도 네 개 층 높이 가운데 3층 한 곳에만 내서 안마당이 들여다보이게 했는데 이것 역시 한국 전통 건축의 누각 구조를 본떠 공간 켜를 투명하게 연 것이다. 현대식 건축술의 전형으로 구성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궁궐 냄새가 나는 이유이다. ...(중략)... 궁궐 건축 기법을 부분적으로 섞어 섰다. 예를 들어 노출된 철골 부재를 짙은 갈홍색으로 칠했는데 이것은 궁궐 기둥의 색이다. 산업주의를 신봉하는 국제주의 양식에서는 돌 같은 전통 재료를 배격하는데 화강석을 섞어 쓴 것도 궁궐 건물의 기단이나 계단 같은 곳에 돌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춘 것이다."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1, 임석재, 인물과 사상사- 물론, 설계자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흔적에 대한 논쟁이 있는 땅에는 늘 그렇듯- 나름 조화를 위한 시도를 했다. 우선 건축물 배치계획의 기본을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제안하고 있는 지하유구 보호구역 보존을 받아들여 옥외중정인 유구전시장(36mX36m 정방형, 위 사진)을 중심으로 대략 역ㄷ자형으로 했다. 이러한 배치가 복원된 경희궁 궐역과 분주한 새문안길을 단순한 정방형 평면보다는 어느정도 완충시켜주는데 효과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역으로 얘기하면 정방형 평면보다 나을 뿐 현재 배치보다 더 나은 방법은 더 많다. 즉, 지금의 평면은 '최소한 ~~보다 나을 뿐', 주변 상황을 고려한 '최적의 배치'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복원된 경희궁 궐역과 분주한 새문안길을 완충시켜주기 위해 과거 흥화문이 원래 자리에서 누렸던 종로 서쪽 앵커로서의 위치를 서울역사박물관이 누리게 됐다. 한나라의 수도, 거기서 몇 개 안되는 동서축 그 중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축의 한쪽 앵커를 자신의 손으로 설계한 건축물을 놓는다는 영광을 건축가는 누린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역사박물관 대지의 입지적 중요성을 설계자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경희궁지가 현대 도시 서울에서 단 한군데 밖에 없는 한양 동서축의 터미너스(Terminus)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건축적 제네레이터(Generator)라고 말할 수 있다. 복원된 숭정전과 숭정문은 그 축이 새문안길과 직교하여 대체로 동남향으로 앉혀졌다. 운동장을 이용하여 건립될 시립박물관, 미술관은 다음의 몇 가지 관점에서 정남향으로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판단된다. 첫째는 종로축의 종지부로서 하나의 닻(Anchor) 노릇을 할 수 있는 건축이 되어야겠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숭정전, 숭정문의 영역과 서로의 독립된 위계 질서를 이룩하여, 역사적 건축과 새 시대의 건축이 서로 빛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며, 세 번째로 정북향의 스카이라이트(Skylight)를 활용하여 자연광을 필요한 만큼 인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에서 이다." -경희궁지와 서울시립박물관, 미술관 건립, 김종성, 건축가 1992.8월호(통권121)- 한양 동서축의 터미너스에, 그것도 어도까지 막아가면서 자신의 건축을 올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설계자는 더 과감했었어야 했다. 그 모든 논쟁과 경희궁 복원 및 철저한 역사유적 발굴을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감수하면서 그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설계한 추진력에 비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건물은 너무 조용하고 힘없다. 혹자는 현재의 건물이 '구조체를 노출시킨 간결한 형태에 현대감을 주는 외벽재가 통일된 조형미를 가져다 준다(-한국뮤지엄건축100년, 서상우&이성훈, 기문당-).'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혹자는 현재 건물을 통해 친근하고 구수한 맛을 느낀다는 감상을 피력하기도 하지만 내가 볼때 현재의 건물은 한양 동서축의 터미너스에 앉혀지기에는 너무 조용하다. 혹자는 바로 그런 맛이 한국적인 건축이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난 그런 주장이 마치 우리민족은 '한(恨)의 민족'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이 들릴 정도로 패배적으로 느껴진다. "혹간은 이 박물관 디자인을 Mies van der Rohe의 아류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필자의 관점으로 보면 철골을 구사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영락없이 건축가 김종성씨의 건축이고 한국적이다. Mies의 건물들이 청교도적 신고전주의 양식을 철골조로 철저하게 재현한 거의 신경질에 가까운 구조 표현 방식을 구사했다면, 서울역사박물관은 구조와 표피에서 친근하고 구수한 맛까지 느낄 수 있다. 오히려 한국 목조건축의 구조를 철골 노출을 통해 재구성한 가장 현대적이며 한국 전통의 맛이 배어들은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서울역사박물관 건물은 또 하나의 건축 증표로 경희궁 터에 남게 될 것이다." -Comment: 경희궁터의 박물관화- 전시설계에의 새로운 접근, 윤재원, Ideal 200207(통권119)- 두 번째로,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건축은 복원된 경희궁 궐역과 분주한 새문안길을 완충하는 역할 외에는 도시적으로나 주변 상황적으로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다. 완충의 역할이라면 굳이 구조물을 세울 필요도 없다. 도시계획시설 중에 완충녹지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경희궁에 미술관이 서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결코 아니다. 서울의 중심에 이곳보다 좋은 미술관 자리가 얼마나 더 있을까. 충분한 조사와 합리적인 보존방법을 세우고, 새로 들어설 그 건축의 존재감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바닥이나 지하실 부분은 발굴한 채로(여러 시대에 걸친 지층이 발견되리라는 가정하에) 정리하여 그대로 두고 그 위에 필로티(Piloti)를 세워 건물을 띄우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역사적 장소와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 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성룡, 건축가 1992.9월호(통권122)- 조성룡이 위 글에서 언급한 땅 속 흔적과의 교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박물관은 뒷편에 복원된 경희궁 궐역과의 어떤 관계를 모색해야 했다. 그것도 두 편의 글에서 읽기 지치도록 길게 쓴 내 글에 나온 경희궁의 역사, 광해군까지 거슬러 갈 여유가 없는 일반 시민이 봐도 '이 터가 뒷편의 경희궁과 어떤 관계가 있구나'라는 정도는 지각할 수 있는 설계안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모색하고 있는 방법은 위성사진에서나 확인 할 수 있는, 어도를 따라 달리한 페이브먼트 디자인(Pavement Design)과 2002년 개관전 수정 작업된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구름다리(아래사진)에 시도된 개념 뿐이다. "구름다리는 관람객에게 우측의 숭정전의 시각적인 경험을 하도록 하여 유적과 박물관 전시와의 시각적 연계를 부여함은 물론 우측 끝에 펼쳐질 궁중문화 전시를 관람하는 준비공간 역할을 한다. 저 멀리 경희궁의 정전을 보며 진행할 수 있도록 박물관의 모든 전시동선이 시계바늘 방향을 취하도록 하였다." -Article: 신개념의 전시설계로 향한 첫발자국, 윤재원, PLUS0207(통권183)- 수평적으로 깔린 서울역사박물관 정면에서 입구를 통해 로비에 들어서면 박물관에서 가장 큰 건축적 요소인 계단이 나온다(위 사진). 왜 이렇게 계단 폭이 넓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로비에서 계단이 차지하는 부분은 절대적이다. 심지어 로비에서 무언가를 해야하는 방문객들 조차 그 넓은 계단 뒤에 놓여진 음료수 자판기 앞 의자로 숨어버린다. 계단에 걸터 앉는 사람도 없다. 난 이 필요 이상으로 넓고 심지어 권위적으로 보이기까지하는 계단을 쓸어내 계단 뒷편으로 보이는 옥외공간 유구전시장을 입구에 들어선 관람자가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유구전시장 넘어 있는 경희궁까지 시각적으로 한 눈에 볼 수 있다면 광해군 어쩌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설명 없이 땅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완충해야 한다고 시각적으로 단절시킬 필요까지는 없다. 게다가 내가 언급한 이 시각적인 트임은 바로 경희궁의 어도 방향이 아닌가? "서울에서는 고궁 복원 사업으로 인해 행락객들이 머무를 곳을 잃어버리고 고궁 내 문화시설들은 그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경기도 과천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의 한 공원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이런 서울의 현실을 볼 때 도심 한복판, 그것도 궁터 안에 건립, 개관되는 서울역사박물관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경제 원칙만이 우선하는 도시 서울의 핵심부에 건립된 문화시설이라는 점. 둘째, 왕권의 상징인 궁터에 문화의 상징인 현대건축 박물관이 들어 앉았다는 점. 그리고 셋째, 교과서적 기존 박물관의 전시에서 탈피하여 철저히 유물과 관람객을 위한 격조 있는 박물관 전시를 구현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고전, 근대의 기억을 송두리째 박탈당해야 했고, 알량한 국수주의적 역사 복원 행위는 역사 문화시설을 외각지로 몰아내었다. 이즈음 도심에서의 서울역사박물관 개관은 이처럼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인 도시 서울의 숨통을 약간이나마 터줄 수 있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Comment: 경희궁터의 박물관화- 전시설계에의 새로운 접근, 윤재원, Ideal 200207(통권119)- 애초 이 터에 박물관 및 미술관을 건립하고자 했던건 '노른자위 땅의 선점'이라는 정치적 이슈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슈때문이든 아니든 서울역사박물관은 대규모 문화시설로서도 최적의 위치다. 그리고 위 글에서 윤재원이 언급한 세가지 중요한 의미 외에도 서울역사박물관이 앉혀진 땅은 더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자는 서울역사박물관을 '생존의 문제'로만 접근했다. 1990년대를 휩쓴 논쟁 속에서의 생존, 경희궁 터의 일부에 완충역할로서의 생존 등... 하지만 설계자는 이보다 한단계 더 올라선 '공존의 문제'로 접근했어야 했다. 일반 시민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 경희궁이라는 과거 역사의 공간과 현재 우리가 바글바글 살아가는 삶의 공간 사이, 건립을 반대하는 원색적인 비판과 건립 타당성을 위한 나름의 논리적인 논조가 공존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어야 했다. 역사도시 서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동서축 한 쪽의 터미너스에, 축의 앵커가 되는 위치에 건축을 한다는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김종성의 디테일(Detail) 그리고 Mies의 디테일 올초(2012) 잠시 합사에 있었던 해안건축의 JDS실장과 서울역사박물관에 갈 일이 있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곳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중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JDS실장이 중정을 향해 난 창틀을 보며 김종성의 디테일 다루는 감각을 설명했다. 위 두 사진이 바로 JDS실장이 가르키며 설명한 창틀이다. 왼쪽 사진에 보이는 창문에서 중정으로 열리는 부분은 왼쪽의 창 뿐이다. 창문이 열리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유리면을 잡아줄 틀이 필요하다. 창문이 열릴 필요가 없다면 유리는 틀에 고정시키면 되고 틀은 간단해진다. 그런데 위 오른쪽 사진을 보면 열리지 않는, 그래서 유리를 잡아주는 별도의 틀이 필요없는 오른쪽 부분도 김종성은 열리는 부분(왼쪽 부분)의 창틀과 같은 형태로 설계했다. 창문이 열리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점으로 인해 틀이 달라져 보이는게 싫었던것 같다. 모더니즘을 순수히 기능을 따르는 그래서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는 건축사조로 생각한다면 열리지 않는 부분에 만든 창틀은 장식이고 제거해야 할 요소다. 김종성은 모더니즘건축의 대가 Mies van der Rohe의 제자다. Mies가 설계한 Seagram Building(1958) 입면에 부착된 I빔(I-Beam)은 엄밀하게 얘기하면 장식이다. 동시에 Mies의 토탈 디자인(Total Design)성향을 읽을 수 있는 깐깐한 디테일이기도 하다. JDS실장의 설명을 듣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Seagram Building 입면에 부착된 I빔이 생각났다. Homepage : http://www.museum.seou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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