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그때 그 늬우스] 용두산(龍頭山)서 촛불「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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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일 낮의 성토대회가 끝난 후 하오 七시十분부터 시내 용두(龍頭)산공원에서 경남상고 一, 二학년 一백여명이 다시 촛불을 들고 『악법 거둬치우고 통일이나 빨리 하자』, 『배 고파 못 살겠다 통일이나 빨리 하자』는 등 구호를 외치면서 용두산을 출발, 국제시장, 광복(光復)동, 대교(大橋)로를 거쳐 민주당 도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다가 一시간만인 八시十五분 해산했다.

이날 하오 六시부터 모이기 시작한 학생들은 「마이크」를 단 「택시」를 선두로 손에 촛불을 들고 용두산을 출발, 약 一百「미터」 지점과 대교(大橋)로 신호대 앞에서 사복경찰관의 강력한 제지에 부딪쳤으나 이를 뚫고 민주당 도당 앞에까지 와 연좌「데모」에 들어갔으나 학생 대표의 연설과 함께 경찰의 간곡한 제지로 八시十五분에 해산했다. 한편 학생 중 二년 김정길(金正吉)(一八), 김진석(金珍石)(一八) 양군은 중부산(中釜山)서에 연행됐다. - 1961년 3월 24일>

촛불집회가 시위의 트렌드가 된 느낌이다. 근래 반값 등록금 실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촛불집회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촛불은 대중의 의지를 결집시키는 뜨거운 불꽃이 되고 있다. 흔히 지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목숨을 잃은 두 여중생 추모 집회를 촛불집회의 시작으로 보지만 위 기사를 보면 그 연원이 꽤 오래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처럼 사회적 현상으로 파급되지 않은 일시적인 사건이었지만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는 있었다. 당시 이 촛불시위는 장면 정권이 제정하려 한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전국적인 시위의 하나였다. 계속되는 시위와 군중투쟁에 위기를 느낀 장면 정권은 두 특별법을 만들어 대중의 불만 표출을 억제하려 했다. 그러나 학생과 혁신세력은 두 법안의 비민주성을 질타하고 대대적인 반대 투쟁에 나섰다. 그 절정이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시작된 횃불시위였고, 그 다음날 부산의 고교생 일부가 촛불시위를 벌인 것이다.

<하오 五시十五분경 덕수궁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횃불군중 百여명이 몰려들었는데 이를 제지하려는 기마경찰관에게 이들은 횃불을 던지기 시작하여 이 사태를 구경하러 밀려든 군중들로 광장은 한때 수라장으로 화했다. - 3월 23일> 이처럼 횃불을 무기처럼 사용한 3월 22일의 횃불시위는 정치권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고, 결국 두 법안은 국회 통과가 무산되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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