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과 근대 사이의 학문적 단절 잇기’ 심포지엄
자발적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고 일제의 지배하에 놓여야 했던 역사의 비극은 우리 전통학문 자산을 창의적으로 발전·계승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게 했다. 계명대 한국학연구원이 지난달 29일 개최한 ‘근대 이전과 근대 사이의 학문적 단절 잇기’ 심포지엄은 그간 전통학문을 부정하고 비판해 온 근대학문관을 넘어 한국 전통문화의 철학적·과학적 성과들에서 근대학문과의 ‘연속성’을 발견해보자는 취지로 열렸다. 참여한 학자들은 문학·사학·철학 분야로 나눠 이 같은 작업을 모색했다.
문학 분야에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황재문 HK교수는 이광수의 ‘문학이란 何오’, 이태준의 <문장강화>, 임화의 <개설 신문학사>를 통해 근대 초기에 대두된 문학론의 한계와 의의를 짚었다. 황 교수는 “이광수는 전대의 문학을 ‘문학’이 아니라고 규정했고 이태준의 경우도 <문장강화>에서 한문으로 된 고전산문을 배제하고 국문고전산문까지 모범적인 글의 사례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황 교수는 다만 임화의 경우 “ ‘서구적 문학의 이식’이 있기 전에도 조선에 문학이 존재했다고 말했고 모방이나 이식을 통해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지는 않았다”며 “한계는 있었지만 이광수나 이태준보다 진전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외국 사례를 토대로 이뤄진 문학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오늘날의 현실은 이들의 연구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되풀이하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29일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주최로 열린 ‘근대 이전과 근대 사이의 학문적 단절 잇기’ 심포지엄. |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제공
성균관대 황호덕 교수(국문학)는 구한말 대한협회의 기관지였던 ‘대한민보’에 나타난 만평 분석을 통해 “언어적 실천과 도상학적 실천이 교차하는 근대 미디어 기획의 한 사례로 주목된다”고 밝혔다. 대한민보는 매호 빠지지 않고 1면 중앙 2단에 만평을 비중 있게 실었으며 이때 게재됐던 만평은 한국 최초의 만화로 기록되고 있다. 황 교수는 “그림과 화제가 등장하는 동양화의 전통 속에서 만화 양식을 절합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학 분야에서 서울시립대 배우성 교수(국사학)는 조선후기 역사학과 신채호의 연속성에 주목했다. 배 교수는 “신채호가 안정복과 이종휘로부터 단군과 을지문덕 등을 발견했지만 그보다 이들이 추구한 역사학이 현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실천적인 과정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채호에게도 역사학은 무엇보다 실천을 위한 학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조선후기 역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의 개별성을 논의하면서 보편성과의 내포·외연 관계 속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이는 오늘날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지역사 연구 등에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계명대 이윤갑 교수(사학)는 전통사학이 ‘과학’은 부족하지만 ‘철학’으로서 오늘날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근대로 들어오면서 역사학은 인문성이 약화됐고 이는 철학의 빈곤을 심화시켜 결국 역사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자가당착적 한계에 빠지는 모순을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전통 역사학은 과학보다는 역사철학에 가까웠으며 철학적 역량에서는 분명 전통 사가(史家)들이 근대의 역사학자를 앞섰다”며 “이를 계승·발전시킨다면 근대 역사학이 축적해 온 과학적 성과를 역사 진보의 유력한 자산으로 전화시킬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본다”고 밝혔다.
철학 분야에서 서울대 김영민 교수(정치외교학)는 의미사의 관점에서 다카하시 도오루의 조선시대 이기론 연구를 비판하면서 연암 박지원에게서 근대로 이어질 수 있는 지적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다카하시 도오루가 조선시대 철학의 단조로움을 얘기했지만 의미사적 입장에서 봤을 때는 똑같은 것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의미부여가 이뤄지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동어반복을 곧바로 단조로움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기론은 단순히 세계를 설명하는 틀이라기보다는 세계와 우리를 매개하는 상징계를 점유하기 위해 의미적 인간들이 벌이는 전투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 ‘천하는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라고 말한 박지원의 사상에 의미사적 관점이 들어 있다”고 밝혔다.
대구한의대 박홍식 교수(일본어전공)는 “한국 전통철학의 맥을 이어나가려면 무엇보다 한문으로 된 내용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호환 가능한 ‘개념어’를 발굴해 내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