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때리고도 세력가가 멀쩡한 이유

정희상 기자 2011. 8. 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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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청의 한 고위 공직자가 강릉 지역 세력가의 폐해를 고발하는 '양심선언'형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해 지역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강릉 지역 토착 비리 의혹을 처음 다룬 < 시사IN > 제201호 기사에 소개된 '강릉시 고위 공무원 폭행사건'에서 피해자로 등장한 권혁문 행정지원국장이 그 주인공이다.

권혁문 국장 폭행 사건과 후속 처리 과정은 강릉 지역 세력가의 위세와 무소불위의 힘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권 국장은 지난 6월8일 강릉시청 8층 경제진흥국장 집무실에서 지역 최대 세력가로 평가받는 (주)승화 썬크루즈 박기열 대표로부터 7~8차례에 걸쳐 얼굴을 폭행당했다. 가해자인 박 대표는 권 국장의 고교 5년 후배. 졸지에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차별로 얼굴을 얻어맞은 권 국장은 실핏줄이 터져 치료를 받는 외에 정신적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고 말했다. 어디에 드러내놓고 말 못할 수치스러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는 것이다.

ⓒ뉴시스 강릉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8월10일 최명희 시장을 상대로 특혜 비리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기열 대표는 왜 벌건 대낮에 시청에 찾아가 선배이자 고위 공무원인 권 국장을 무차별로 폭행했을까. 강릉 지역 대표 관광지인 정동진에서 썬크루즈 관광레저업을 운영하는 박기열 대표는 올해 초 강릉시청에 정동진 일대 바닷가 공유수면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민원을 넣은 상태였다. 담당 공무원이던 권 국장은 이를 거절했다. 지역 어민들이 생업을 위해 바다에 드나드는 출입구를 박씨의 회사가 영리 목적으로 독점 사용토록 허용해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행정의 원칙은 균형과 형평성, 주민 복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공유수면은 말 그대로 지역 주민이 공유하여 사용해야 할 곳인데 어촌계와 어민의 생업을 무시하고 임의로 특정 기업의 영리 활동만을 위해 허용해준다면 특혜이자 횡포라고 생각해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라고 권 국장은 말했다.

박씨는 그곳에 파라솔과 비치발리볼장을 설치하고, 머드 체험장 등을 만들어 여름 피서객을 상대로 영업을 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권 국장이 공유수면 점·사용 허가서를 반려하자 앙심을 품은 박기열 대표가 다짜고짜 시청에 쳐들어온 것이다. 권 국장에게 욕설과 폭행을 행사한 그는 시청 직원들이 만류하자 일언반구 없이 현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언론과 법원 악용한 가해자의 '작전' 먹혀

이유 여하를 떠나 이 사건은 명백한 공무집행 방해이자 폭행 사건이었다. 시청 집무실에서 근무 중이던 고위 공직자가 폭행을 당했으면 당연히 상급자인 시장과 부시장 등이 원칙적으로 강력 대응하는 게 상식일 터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이없는 반응뿐이었다. 권 국장은 "폭행당한 지 10분 후쯤 부시장이 전화해 박기열과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본 게 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씨가 나를 패고 나가면서 부시장에게 전화해 천연덕스럽게 '제가 사고치고 갑니다'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 부시장이 박기열의 사과를 수용하라고 종용했지만 내가 반발하며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권씨에 따르면 가해자인 박씨는 6일 동안 폭행 피해자인 권 국장에게 사과는커녕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건 발생 6일 뒤 경찰이 사건을 인지하고 수사를 시작하자 다급해진 박기열 대표가 피해자인 권 국장에게 첫 연락을 해왔다. "그날 심상열 공보감사담당관이 사과를 시킨다고 박기열을 나에게 데려왔기에 심 담당관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 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박씨가 다짜고짜 사과하겠다며 합의서를 써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공무집행 방해는 피해자가 국가이므로 사과와 상관없이 처벌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과 수용과 합의서 쓰기를 거절했다."

하지만 6월29일자 < 강원일보 > 와 < 강원도민일보 > 에는 '폭행 물의 리조트 대표 강릉시청과 국장에 사과'라는 기사가 실렸다. 가해자 중심으로 사실과 다른 일방적인 언론 플레이가 펼쳐진 셈이었다. 박씨는 또 춘천지법 강릉지원에 일방적으로 금전 1000만원을 공탁한 뒤 '공탁원인 사실란'에 "공탁자(박기열)는 피공탁자(권혁문)에게 사과했고, 공탁자의 사과를 받아들여 쌍방은 화해를 했으나 피공탁자가 손해배상금 수령을 거부하니 1000만원을 공탁합니다"라고 허위 사실을 기재했다.

이처럼 지역 언론과 법원을 교묘히 악용한 박씨의 '작전'은 먹혀들었다. 춘천지검 강릉지청이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박기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영장을 재청구할 것인지 고민에 빠진 강릉지청은 '시민위원회'를 소집했다. 시민위원회에서 영장 재청구를 묻는 투표가 진행됐다. 결과는 8대1로 박기열씨를 봐주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현재까지 박씨는 기소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사태 전개에 남몰래 설움을 곱씹던 피해자 권혁문 국장은 최근 용기를 냈다. < 시사IN > 의 토호 비리 보도가 결정적 자극제였다. "열심히 현장 근무하는 공무원을 사업자가 들어와 시 청사 내에서 폭행을 해도 그냥 넘어간다면 강릉이 부끄러운 일이고 후배 공무원들에게도 얼굴을 못 들 일이다. 토호에게 폭행당한 피해자는 나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이기도 하다. 공직 생활 막바지를 정의롭게 마무리하고 싶다"라고 그는 말했다.

ⓒ뉴시스 강릉 최대 세력가로 평가받는 박기열 대표가 운영하는 정동진 썬크루즈.

그가 나선 데는 토호가 군림하는 강릉 사회의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도 작용했다. 폭행 사건 직후 강릉시청은 권 국장을 경제진흥국에서 행정지원국장으로 전보 발령했다. 함께 근무하며 박기열씨의 공유수면 점·사용 허가를 반대하던 해양수산과장도 다른 부서로 전보시켜버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소조차 되지 않고 버젓이 활보하는 박씨에게 강릉시는 더 큰 선물까지 안겨줬다. 권 국장이 백색 테러까지 당해가며 지키려 했던 공유수면 점·사용권 4개 중 파라솔 설치와 비치발리볼장 설치 허가를 내준 것이다.

강릉지청 "원점에서 다시 수사하겠다"

이에 대해 강릉시청 해양수산과 관계자는 "전입 온 지 3주 됐는데 오자마자 '정동진 공유수면 신청에 따른 검토 결과 및 처리 계획'이 과에 마련돼 있어서 그에 따라 적법하게 허가를 내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유수면 점·사용을 허가한다는 것은 어민 출입로를 막고 이를 썬크루즈 회사가 사유화하도록 해준다는 의미다.

과연 박기열 대표의 사과를 수용하라고 권 국장에게 종용해오던 강릉시청 수뇌부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권혁문 국장으로부터 이 사건 진정을 접수한 강릉지청은 원점에서 다시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이기동 강릉지청장은 "지금 확인해보니 당시 가해자인 박기열씨가 언론 플레이로 쇼를 벌여 시민위원들이 속아 넘어갔던 것 같다. < 강원일보 > 와 < 강원도민일보 > 에 두 사람이 서로 원만히 합의한 것처럼 보도가 나오니까 시민위원들이 그대로 믿고 선처했던 듯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양 당사자를 불러 엄정히 조사하겠다"라고 말했다.

< 시사IN > 은 폭행 사건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박기열 대표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이에 박 대표는 썬크루즈 비서실을 통해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라고 밝혀왔다.

정희상 기자 /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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