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 선택한 최동원

입력 2011. 9. 16. 15:49 수정 2011. 9. 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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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정길 기자]

14일 별세한 고 최동원 감독은 1991년 실시된 부산광역시의원 선거에서 '꼬마민주당'으로 부산 서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사진은 선거 홍보물.

ⓒ 사람사는세상

또 한 사람의 거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고 최동원 선수 이야기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최동원 선수는 한국시리즈에서 5회 연속 등판하여 4승1패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가져다 준 '전설'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최동원 선수를 추억하는 이유는, 한국시리즈 우승 때문만은 아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억대 연봉이라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연봉을 받는 최정상급 투수이면서 1988년 선수협 결성에 앞장 섰다가 롯데 구단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트레이드 대상이 되었고, 이후 제대로 마운드에 서보지 못한 채 야구장 밖을 전전하다 대전 한화 코치를 잠깐 맡았을 뿐, 끝내 부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민자당 공천 뿌리치고 기꺼이 '꼬마 민주당' 선택

내가 최동원 선수와 인연을 맺은 것은 3당야합 이후 처음 치러진 초대 지방자치 선거에서 였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지키던 나는 최동원 선수를 만나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줄 것을 권유했고, 그는 망설임 없이 흔쾌하게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시 서구의 광역의원에 도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남고 후배였던 그는 당시 여당인 민자당에서도 노리던 블루칩이었지만 민자당의 공천을 뿌리치고 기꺼이 민주당 공천을 택했다.

그는 선거도 곧잘 치렀다. 그가 내건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은 자신의 야구인생과 새 정치를 연결한 탁월한 슬로건이었다. 나도 열심히 최동원 후보의 선거유세에 나서 그를 지원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광역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이후 14대 총선에서 그는 나의 지역구인 영도에 와서 선거운동도 해주었지만 3당야합을 거부한 노무현과 나는 부산에서 나란히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내 생각으로, 최동원 선수가 단순한 야구 영웅에서 진정한 인생의 영웅으로 거듭난 것은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당시 민자당을 선택했다면 지금쯤 몇 선 의원이 되어있거나, 야구계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걸 마다했다.

내가 최동원을 '진정한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까닭이다.

기득권과 타협하기보다는 소외받는 사람 편에 서

그는 진정한 부산 '싸나이'였다. 그에게 돌아온 불이익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진정한 거인(자이언츠)이었다. 지역주의의 높은 벽에 막혀 비록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높디높은 지역주의의 벽에 당당하게 맞선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그는 거인,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이제 오늘로 우리 곁을 떠났다. 한 사람의 거인, 한 사람의 영웅을 이렇게 슬프고 아프게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기득권 세력에 굴종하고, 지역주의를 묵인했던 우리들의 탓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본다.

최동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진정한 거인의 퇴장에 무한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삶, 그의 끊임없는 투쟁과 도전정신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전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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