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팝 열풍에 왜 음악은 없을까

[엔터미디어=나도원의 오늘 음악이 건넨 말] ‘여기에서는 희한한 일들이 일어난다.’ K-POP 열풍을 다루는 방식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고 있자니 아르헨티나의 작가 루이사 발렌수엘라의 소설 제목을 얻어 쓰고 싶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자동차 몇 대를 판 것과 같은 경제효과”나 “몇 조원의 부가가치 창출”과 같은 문구를 반복 사용한다. 명쾌하다. 그런데 지나친 명쾌함은 종종 모호함과 마찬가지다.

외국의 어느 도시에 한류스타의 공연을 요구하며 수백 명의 팬들이 모였다는데 화면을 아무리 봐도 수십 명의 십대 소녀들만 보이고, 팬들 때문에 중심가가 마비되었다는데 아무리 봐도 차들은 잘만 다닌다. 몇몇 기획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해외 투어와 이벤트에 동행한 기자들이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대중이 살짝 흥분하다보니 마치 요동정벌이라도 나설 분위기가 되었다. 물론 가요 한류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장의 관점에선 좋은 사례이고, 콘텐츠 면에서도 상품의 질과 비즈니스 전략이 발전한 결과이다. 그래도 좀 쉬어가며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버스에 탄 채로 뛴다고 해서 더 빨리 가지도 않고, 늦지도 않는다.

가장 희한한 것은 분명히 음악이 관련된 현상인데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가요가 돈을 벌어들이면 작곡가의 처우가 개선되는지, 대중이 다양하고 수준 높은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는지, 덕분에 숨겨진 음악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하며 대중과 만날 기회를 더 자주 갖게 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스타가 되고 싶으면 노예가 되어야 하는 어린 가수들의 권리가 강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언급되지 않는다. 어째서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하물며 축구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핸드볼 대표팀이 메달을 따면, 근사한 점프를 선보인 김연아가 우승하면, 그리고 널찍한 어깨의 박태환이 수상대에 오르면 늘 함께 다뤄지던 국내 현실에 대한 점검이 유독 한류를 다룰 때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K-POP 열풍을 다루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무심하거나, 무지하거나, 아니면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이 현상이 애초부터 음악과는 무관하기 때문일까? 위에서 잘 되어야 아래쪽도 나아진다는, 설득력이 약해지는 주장을 강력히 제시하기도 하지만, 차라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음악도 그냥 돈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더 솔직해 보인다. 정리하면, 아이돌 가요의 성공요인은 명확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음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전혀 명확하지 않다.

◆ 바야흐로 대통령도 한류스타

노르웨이에서 무수히 많은 양민을 희생시킨 테러 용의자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한국을 이상적인 보수사회이자 민족주의 국가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또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인물 중 한 명으로 꼽았다고 한다. 이로써 대통령도 한류스타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야 별로 자랑스럽지 않으나, “K-POP 열풍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문화한국의 국위선양에 큰 도움’이 되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지금 한류를 보도하고 대하는 태도를 압축해놓은 이 문장은, 놀라지 마시라, 박정희 정권기인 1972년의 문예중흥선언과 문예중흥5개년계획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40년 전의 관점이 그대로다보니 한류에 대해서도 어떤 판타지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역-오리엔탈리즘이다.

예전에 교과서는 백제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국가들과 일본의 유사성은 우월적인 문화전파라면서 중국과의 유사성이 발견될 때에는 세계화 혹은 국제교류의 증거라고 학습시켰다. 아무래도 좀 불공평해 보인다. 또 한반도는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 모양이라고 가르쳐주는 선량한 분들이 있었다. 일제가 토끼 모양이라고 주입했지만 실제로는 만주벌판을 향해 내달리는 호랑이 모양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봐도 호랑이 모양이라는 그림은 영 억지스러웠다. 그리고, 토끼면 좀 어떤가? 토끼 모양이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순응적이 된다면 장화처럼 생긴 반도에 사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발 냄새가 꽤 심해야 할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한국의 노숙자 사진을 교과서에 실었다고 법석을 떨고, “걸핏하면 한국이 원조”라더라는 중국인의 비아냥거림에 마음상해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일본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에는 그들의 반응에 유난히 신경을 쓰며 패배감에 젖어 자국 선수들을 비난하고 한국의 저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댓글을 찾아내고야 만다. 존중이 필요한데도 아직까지 동아시아에서 중국인의 혐한감정과 한국인의 중국 무시 풍조, 그리고 한국인의 일본인 비하와 일본의 한국 무시가 여러 겹으로 겹쳐있으니 그럴 만하다. <무릎팍 도사>의 강호동도 ‘시청자’를 써야 할 자리에 ‘국민’이란 단어를 쓸 정도로 모두가 ‘국민’이다보니 그럴 만도 하다. 부디 고(故) 리영희 선생과 같은 분이 ‘국민’의 용법에 대하여 어떤 문제제기를 했는지 참고했으면 한다. 그러면서 선진국에는 없는 주민등록번호를 당연시하고 거의 모든 주민이 아무렇지 않게 지문날인을 하며 살고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자기 옷에 묻은 얼룩은 보지 않으려 하면 낮은 데로 임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K-POP 열풍을 주도하는 아이돌 그룹들 중 여럿은 외국인 작곡가들이 만들어준 곡을 부르고, 외국인 안무가가 만든 춤을 추고 있다. 웬만한 팬들은 다 알고 있다. 순수국산으로 해외시장을 평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민족주의와 애국주의가 한류를 지지한다는 주장이나 한류가 문화한국의 실력을 보여준다는 주장이나 설득력이 약하기로는 피차일반이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묘하게 하나로 모이는 지점이 있다. 한때 한국은 순혈주의가 팽배한 나라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인은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백인과 흑인 그리고 동남아시아인을 구별했고, 백인 중에서도 서유럽인과 동유럽인을 구별했다. 기준은 ‘잘사는’과 ‘못사는’이다. 결국 과거에 대중예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경제성장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로 가치가 갈리는 기준이 더해진 것이다.



◆ 한류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음악은 행복한가

얼마 전에 열곡을 제시하고 독자가 한곡씩을 고르는 이벤트를 한 적이 있다. ‘그녀의 웃음소리뿐’이 압도적인 1위를 했는데, 이 곡을 처음 들은 분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이문세의 신곡으로 안 경우도 있었다. 세대가 다르니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에선 자국의 19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명곡을 많은 어린 세대가 모르기도 힘들고,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단지 세대가 달라서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선 <나는 가수다>와 같은 프로그램에 소개되지 않는 한 우리의 명곡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이상한 상황이다. 최근에 또다시 드러난 순위조작 비리는 우리 대중음악의 취약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들이 대중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도 알려준다. 공정한 차트의 존재와 방송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음악세계에 대한 기대는 굳이 반(反)시장주의까지 갈 필요도 없다. 반(半)시장의 ‘봉건자본주의사회’인 한국을 직시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K-POP 열풍은 이런 사정의 개선과는 무관해 보인다. 오히려 더 심화시킬 수 있다. 어떤 정치인·관료와 기관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지원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기획사들도 전술적으로 한국 브랜드 홍보를 병행하고 있다. 한정된 예산을 ‘효자상품’에 집중시키면 다른 쪽은 그만큼 줄어든다. 어느 공사에 22조원을 투입하면 다른 쪽에 들어갈 예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 보면 기회손실이다. ‘열풍’ 이후의 충격대비를 위해서라도 다양성을 제고하고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와 관련기관의 역할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심한 편인 음악의 표준화를 더 심화시키려 하니 우려스럽다.

‘SM시대’의 오늘이 있게 한 이수만씨가 가수시절에 부른 노래들을 좋아한다. 그는 좋은 가수였고, 지금은 탁월한 경영인이자 전략가이다. 몇몇 아이돌 기획사의 기업가치는 인정해야 한다. 다만 SM엔터테인먼트가 동방신기에서 분화한 JYJ에게 보이는 패권적 행태는 한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도 하고, 한국형 기획사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외국에서마저 심심찮게 제기되는 것까지 외면해선 곤란하다. 일부 기획사 주도의 K-POP 현상을 오로지 경제 가치로만 평가해서 연습생 갈취 등의 비리가 끊이지 않는 연예계에 대한 근원적인 개혁을 미루고 일벌백계가 아닌 백벌일계에 그쳐도 별로 상관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건축에는 리듬이 있다. 그 중에서도 고층빌딩은 인류에겐 자부심을, 개인에겐 열등감을 주는 묘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최고층 빌딩인 밀레니엄타워의 높이가 202미터라는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초고층 빌딩이 많지 않은 한국의 63빌딩보다도 47미터나 낮다. 고층빌딩 따위 없어도 자신이 있는 도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린 자신을 고층빌딩과 동일시하며 뿌듯해 하고자 한다. 행여 그 고층빌딩이 작은 주택들을 밀어내는 재개발을 통하여 세워지고 유지되는 건 아닌지 한번쯤, 아니 두어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철에서 화장을 할 정도로 바쁘더라도, 누구에게나 그 정도의 시간은 남아 있다.


칼럼니스트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nadowon@naver.com


[사진=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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