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붕괴의 서곡인가 희망의 전조인가

정원식 주간경향 기자

아랍의 봄·유럽 경제민주화 요구·월가 점령시위 등 시민사회의 대반격

2011년은 변혁의 기운으로 들끓었던 한 해다. 낡은 껍질을 뚫고 새로운 것이 분출하는 사건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다. 그것들은 옛것의 붕괴를 알리는 서곡인 동시에 새것의 출현을 예감하게 하는 희망의 전조였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아랍에서는 오랜 정치적 압제의 쇠사슬이 격렬한 파열음을 내며 끊어져나갔다. ‘아랍의 봄’은 한 20대 청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이름은 모하메드 부아지지. 대학을 졸업한 튀니지의 과일 노점상이었다. 수년 동안 경찰의 단속과 괴롭힘에 시달려온 그는 지난해 12월 17일 경찰에게 또다시 손수레를 빼앗기고 뺨을 맞는 폭행을 당했다. 항의하러 간 관공서에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자 그는 몸에 시너를 끼얹고 성냥에 불을 그었다. 부아지지는 올해 1월 4일 끝내 사망했다. 그의 분신자살 소식은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급속도로 전파돼 엘아비딘 벤알리 대통령의 23년 장기집권을 끝낸 ‘재스민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재스민 혁명의 불길은 이슬람 문화, 높은 청년인구, 고물가와 고실업률, 오랜 경기침체,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스마트폰과 SNS의 보급이라는 유사성을 지닌 이웃 아랍국가들로 옮아붙었다. 예멘, 요르단, 알제리, 오만,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 인접 국가의 독재정권들은 들불처럼 번지는 민주화 요구를 피할 수 없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는 지난 2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집권 30년 만에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내전 양상으로까지 치달은 리비아에서는 지난 10월 반군과의 교전 중 카다피가 사망하면서 그의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은 지난 11월 자신의 권력이양안에 서명했다.

아랍권 강타한 ‘재스민 혁명’

아랍 민주주의는 그러나 비틀거리면서 전진하고 있다.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는 올해 초 무바라크의 퇴진과 사법처리 이후 광장을 비웠지만, 군부의 민정이양 약속이 지체되자 지난 11월 또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군부가 신속한 민정이양을 약속하며 한 발 물러섰지만 시위과정에서 30여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다쳤다. 시리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지난 3월 이후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사망자만 4000여명이 나왔다. 그럼에도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2월 7일 미국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시위대 진압군에게 시민들을 죽이거나 잔인하게 진압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이집트 카이로 시민들이 지난 2월 11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연합

이집트 카이로 시민들이 지난 2월 11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연합

‘아랍의 봄’이 정치권력의 독재에 저항하는 청년들의 정치적 민주화 요구였다면, 올해 유럽과 미국에서 터져나온 시위는 1%의 경제력 독점에 항의하는 청년들의 경제민주화 요구였다. 스페인에서는 지난 6월 수만명의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가 스페인 주요 도시 광장에 집결해 긴축재정과 낡은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가부도 상황으로까지 내몰린 그리스에서도 지난 5월 말 이후 ‘분노의 시민운동’이라고 명명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됐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3000여명의 청년들이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후 50여개 도시로 시위가 확산됐다.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분노가 가장 상징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은 ‘미국의 가을’을 달군 월가 점령 시위다. 시작은 소박했다. 9월 17일 수백명의 청년들이 미국 뉴욕 주코티공원에 모여 텐트를 설치하고 세계 금융의 심장부인 월가를 행진했다. 미국 주류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지만 시위대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SNS의 힘을 빌려 미국 전역에서 동조 점령 시위를 조직해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심화된 중산층의 몰락, 청년실업,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 등이 시위 확산의 직접적 배경이다. 월가 점령 시위는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를 퍼뜨리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얻어내, 지난 10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82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월가 점령 시위에 동조하는 동시다발 시위를 이끌어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14일, 이처럼 전 지구적 저항을 이끌어낸 ‘시위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타임>은 아랍과 유럽, 미국을 거쳐 최근 러시아로까지 번진 시위의 핵심을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지역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시위는 민주주의의 소스코드이자 민주주의가 결핍되어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한국 흔든 반값 등록금·안철수 현상

2011년 이 행성의 시민들은 ‘원자력 르네상스’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도 목격했다. 바로 지난 3월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뛰어넘는 최악의 방사능 재해로 기록될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전 건설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촉구한 사건이다. 원전 중단 바람의 진앙지는 독일이었다. 사고 직후인 지난 3월 12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는 6만여명의 시위대가 원전 폐쇄를 요구하며 45㎞ 길이의 인간띠를 만드는 시위를 벌였다. 이틀 뒤에는 독일 전역에서 11만여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3월 말에는 독일 주요 도시에서 26만명이 원전 추방을 외쳤다. 반핵시위는 3월 말 독일의 지방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58년간 기민당 출신이 주 총리가 됐을 만큼 집권 기민당의 텃밭이었던 바덴-뷔르템베르크 지역에서 기민당이 즉각적인 원전 폐쇄를 내세운 녹색당-사민당 연합에 패했을 뿐만 아니라, 녹색당 후보가 주 총리로 선출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은 결국 지난 5월 2022년까지 독일 내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스위스와 이탈리아도 원전 건설 중단을 결정했다.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 5월 지식경제부 에너지자원실 내에 원자력전담국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11월 21일에는 원자력진흥위원회를 열고 2016년까지 모두 6기의 원전을 예정대로 짓기로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2016년까지 ‘세계 3대 원자력 수출 강국’이 되겠다는 목표를 천명했다.

하지만 한국이 올 한 해 진행된 세계적 차원의 변혁과 같은 궤도를 그리고 있는 지점도 있다.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시위, 희망버스를 통해 나타난 시민들의 연대, 기성정당체제의 존재 근거를 바닥부터 뒤흔들고 있는 ‘안철수 현상’ 등이 그렇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학 미국학과 교수는 이러한 국내적 상황이 전 세계적 시스템 변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는 “시민의 삶으로부터 이탈한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라며 “시민의 삶으로부터 이탈한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낡은 패러다임이 앞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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